문정일 교수의 생활산책(29) - 유진오 총장과 흙 한 삼태기

문정일(목원대 명예교수, 수필가)

현민(玄民) 유진오(兪鎭午, 1906~1987)박사가 고려대학교의 제2대 총장이 된 것은 초대총장인 현상윤(玄相允, 1893-1950)박사가 1950년 6.25전쟁 때 납북(拉北)됨으로써 그의 뒤를 이어 1952년부터였다. 그가 초대총장의 잔여임기와 2대, 3대, 4대 총장으로 14년을 연임하고 1965년 8월말 정년으로 퇴임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1963년부터 박정희정부가 일본과의 한일외교정상화회담을 시도하면서 이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데모가 전국으로 확산되어 온 나라가 뒤숭숭하고 혼란스런 상황이 계속되더니 대학생들의 데모형태가 점점 거세어지면서 데모대와 이를 진압하던 무장군인들과의 쫓고 쫓기는 상황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학생들의 데모는 1964년과 1965년 8월까지도 계속되었는데 1965년 8월 17일 이윽고 정국을 혼란으로 몰아넣을 큰 사건이 터지고야 말았다.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던 고려대 학생들이 무장군인들에게 쫓겨서 대학캠퍼스 안으로 피신했는데 무장군인들이 닫힌 교문을 타고 넘어가 학생들의 도피성(逃避城)이라고 할 수 있는 구내도서관에까지 쫓아가 학생들을 강제로 연행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유진오 총장의 제4대 총장으로서의 임기가 그해 8월말로 만료되어 8월 26일에 총장퇴임식이 열렸는데 이날 유진오 총장의 퇴임사의 핵심은 자신의 총장퇴임을 불과 며칠을 앞두고 무장군인의 난입으로 인하여 신성한 학원이 군화자국으로 얼룩진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한 회한(悔恨)이었다. 그 때 나는 학부학생으로 대운동장에서 거행된 유진오 총장의 퇴임식에 참석했었다. 우리나라의 역사에 몇 가지 큰 획을 그었던 그 어른이 퇴임식에서 무슨 말씀을 하려나 하고 신경을 곤두세우고서 그분의 메시지를 경청하였다. 그날 유진오 총장은 공자님의 말씀을 인용했는데 그때 그 분이 설명한 원문은 이해하지 못하였으나 그 내용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공자님이 삼태기로 흙을 파다가 산을 만드는데 마지막 한 삼태기가 모자라 그 산을 완성하지 못했다"는 말씀이었다.

연전에 《논어》를 공부하면서 유진오 총장이 인용한 원문을 찾아보니 자한편(子罕篇)에 나오는 말로 "비여위산 미성일궤(譬如爲山 未成一簣)"였다. 원문을 풀이해 보면 "비유컨대 (흙을 쌓아) 산을 만드는데 한 삼태기[一簣]로 인하여 성공하지 못하였다."는 뜻이 된다. 《서경(書經)》에도 유사한 글귀가 나온다. “아홉 길이나 되는 높은 산을 쌓아올리는데 한 삼태기가 부족하면 공이 모두 무너진다.”는 내용이다. 이 말의 출전(出典)에는 부연(敷衍)설명이 나와 있다. 중국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폭군 주왕(紂王)을 제거하고 새로이 천하의 주인이 되었을 때, 하루는 서쪽 먼 나라 사람들이 큰 사냥개 한 마리를 공물(貢物)로 바쳤다. 사냥개의 허우대가 탐스럽고 사람의 말도 잘 알아듣는 참으로 영리한 개였으므로 욕심이 생긴 무왕은 사냥개를 받으려 하였으나 충성스런 신하 소공(召公)이 반대하고 나섰다. “사냥개를 받으면 사냥을 하게 될 테고, 사냥을 하게 되면 결국 사치와 향락에 젖어들게 될 것”이라는 것이 만류(挽留)의 이유였다.

이 고사의 교훈은 “조금만 더 노력하면 목적을 이룰 수 있는데 한 삼태기가 부족해서 헛수고가 되듯이 천신만고 끝에 이룩한 무왕의 왕도정치가 사냥개 한 마리 때문에 무너진다면, 그것은 마치 사소한 문제 때문에 전체의 계획이 허사가 됨”을 경고하는 말일 터이다. 무왕에게 충언(忠言)을 간(諫)한 소공도 훌륭하지만 신하 소공의 충언을 받아들인 무왕을 더 칭송해야 할 일이다.

최근까지 우리나라 전직 대통령 두 사람이 장기간에 걸쳐 영어(囹圄)의 몸이 된 상태로 재판을 받는 우리나라의 정치적 상황을 바라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무왕에게 충언을 간했던 소공과 같은 용기 있고 어진 신하가 이 두 전직 대통령에게는 없었다는 사실이 여한(餘恨)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