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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봉 칼럼] 연자 누님과 평화통일

기사승인 2022.09.24  14: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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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봉(원광대 정외과 명예교수, 평화학)

이재봉(원광대 명예교수, 평화학)

막내누님 이연자, 절약이 몸에 밴 사람

이연자, 내 막내누님이다. 1946년생이니 올해 76세. 2022년 9월 원광대학교 발전기금 5천만원 전달식을 가졌다. 10월엔 국경선평화학교 장학금 3천만원 전달식을 갖기로 했다.

누님은 강원도 원주의 13평짜리 비좁고 낡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 여름엔 에어컨 없이 선풍기로 무더위 이기고, 겨울엔 난방비 아끼려고 전기장판 하나로 강추위 견딘다. 수돗물도 데워 쓰지 않는다. 비누 조각들을 버리지 않고 모아 헌 스타킹에 담아 쓴다. 옷과 신발은 싸구려 시장에서 장만한다. 두어 해 전 큰 교통사고 당하기 전까진 무거운 짐 양손에 들고도 택시 잡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누님이 품고 살아온 두 가지 한... 못생긴 것과 못 배운 것

누님은 평생 두 가지 한을 품고 살아왔다. ‘못생긴 한’과 ‘못 배운 한’. 첫째, ‘못생긴 한’이다. 오빠, 두 언니, 두 남동생 모두 코가 오뚝 솟고 얼굴이 잘생긴 편이다. 막내동생인 나도 1998년 입이 비뚤어지고 눈이 찌그러지는 구안와사(안면신경마비) 걸리기 전까진 미남이란 소리 좀 들었다. 연자 누님만 예외였다. 코가 납작하고 얼굴이 못났다. 셋째 딸인데도. ‘최진사댁’뿐만 아니라 어느 집안에서든 셋째 딸이 가장 예쁘다는데....

누님이 스물일곱 살에 집을 나가버렸다. 몇 년 뒤 원주에 있는 것 같다는 정보를 구했다. 내가 군대 있으면서 휴가 나와 찾고 보니 조그만 가게를 열고 있었다. 다리 쭉 뻗고 눕기 어려운 방에 둘이 마주 앉았다. 누님은 그간의 모진 삶을 담담하게 털어놨고, 동생은 아무 대꾸 없이 눈물 콧물만 하염없이 흘렸다. 누님은 코 수술비 마련하려고 집을 나서 여기저기 떠돌며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악착같이 돈 모아 코 높이는 수술 받았는데 잘못됐단다. 1970년대라 성형술이 발달하지 않았는지, 소도시 조그만 병원에서 서투른 의사를 만난 건지.

코가 조금만 더 높았더라면...

나중에도 돈 버는 대로 두어 번 더 수술받았지만 코는 여전히 높아지지 않았다. 그래도 워낙 아껴 쓰느라 돈 좀 모았다. 가게에 가끔 들르는 시청 직원이 불쌍하고 착한 아줌마 사연을 알고 주변 밭을 조금 사라고 권해 부동산 투기도 했다. 아마 개발정보를 귀띔 받았던 듯하다. 10여년 뒤 밭이 대지로 변해 억대 부자가 됐다.

그럼에도 70대 할머니가 돼서까지 ‘못생긴 한’을 풀지 못하고 지독한 열등의식과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모든 걸 퍼줘도 아깝지 않을 동생의 큰아들이 2019년 결혼하는데 불참했다. 누님 방에 아마 유일하게 붙여놓은 가족사진이 내 두 아들 모습일 거다. 그토록 사랑하며 보고파하던 조카가 미국에서 나와 결혼식 올린다는데도 사돈네 일가친척들에게 자신 얼굴 드러내기 싫다고 오지 않은 것이다.

못 배운 한 때문에 남을 도우고

둘째, 누님은 ‘못 배운 한’도 품고 살아왔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하고 서당에만 조금 다니며 겨우 글을 깨쳤고, 어머니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 무학자지만, 자식들 교육엔 열성이었다. 1970년대 초까지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던 깡촌에서 논밭 한두 마지기와 손바닥만 한 점방(가게)으로 살림을 이끌며 아들 셋을 객지 고등학교까지 보냈다. 고향에서 내 또래도 1960-70년대엔 초등학교나 중학교만 마치는 게 보통이었으니 1950년대에 큰아들을 고등학교 보낸 건 대단한 일이었다. 덕분에 군청인가 군교육청에서 ‘장한 부모’ 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한 부모님도 딸들을 차별했다. 딸 셋 모두 초등학교까지만 보낸 것이다. 하기야 1960-70년대 시골 딸들은 오빠나 남동생 뒷바라지하느라 도시로 나가 식모나 공순이 되는 게 흔했다. 누님은 공부에 소질도 없었던 모양이다. 말도 어눌하다. 나중에 누님의 물질적 도움 받지 않은 일가친척 하나도 없지만, 그들 가운데 수틀리면 무식하다거나 멍청하다고 모욕하고 멸시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배움에 목 말라 있는 학생들을 위하여 거금의 장학금 쾌척

이렇듯 누님은 ‘못생긴 한’으로 돈을 모아, ‘못 배운 한’을 장학금으로 풀고자 한다. 그 구상을 몇 년 전부터 밝히기 시작했다. 죽으면 무덤 만들어봐야 찾아줄 자식도 없으니 시신을 의과대학 수술용으로 기증하고 싶단다. 자신처럼 배우지 못해 한 맺힐 가난한 아이들에게 학비를 대주고 싶단다. 마침 동생이 교수로 일하는 대학에 기부하면 동생이 높은 자리 하나 맡을 수 있으리라는 욕심도 생겼던 모양이다. 원광대학교에 2억원쯤 내놓고 싶다고 했다. 누님은 동생이 대학교수가 된 걸 큰 자랑거리로 삼으면서도, 말쑥한 신사복에 넥타이 매고 TV에 나오거나 학교에서 학장이나 처장 등 무슨 보직 맡으면 더 큰 출세라 여긴다.

내가 말렸다. 그토록 어렵고 서럽게 살아왔으니, 사치 부리진 않더라도, 좀 더 큰 집에서 냉난방이나마 제대로 하며 좀 더 편하게 여생을 보내면 좋겠다고 했다. 생판 모르는 남남에게 장학금 주는 대신 풍족하지 않게 사는 일가친척 더 도와주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마음도 생겼다. 그 돈 내가 물려받고 싶은 엉큼한 욕심도 들었다. 아무래도 누님의 확고한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애틋하고 고상한 뜻을 저버리면 천벌 받을 것 같아 꾀 좀 부렸다.

동생의 권유에 잘 따르는 누님... 평화연구소ㆍ국경선평화학교 후원

“누님이 늙어가면서 때때로 병원 다녀야 하고 언젠간 요양원에 들어가야 한다. 누님 생전에 누구에게도 전혀 신세 지지 않았듯, 돌아가셔도 아무에게도 부담주고 싶지 않다. 일가친척에게 알리기는 해도 조의금은 한 푼도 받지 않겠다는 말이다. 나는 돈 없으니 병원비, 요양비, 장례비 모두 누님이 남겨야 한다. 요즘은 돈 없어 대학 못 가는 학생 거의 없다. 학생이 모자라 대학마다 학생을 모셔온다. 내가 교수로 일할 때 ‘평화.통일’ 관련 강의를 만들었는데, 원광대학교를 완전히 떠나도 이 강의가 계속 이어지도록 하고, 내가 만든 ‘평화연구소’가 이 일을 맡을 수 있도록 거기에 돈 좀 주자. 철원 국경선평화학교가 새 건물 짓고 있다. 평화와 통일에 관해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학교다. 난 여러 사람들 도움받으며 2천만원짜리 교실 기부운동 벌이고 있다. 누님도 이에 100만원만 보태 달라. 그리고 여기 학생들에게 누님 이름으로 장학금을 건네자. 가난한 학생들 돕는 사람이나 기관은 많으니, 누님은 많은 학생들에게 평화와 통일의식 심어주며 평화학자.통일운동가 될 학생들에게 장학금 주는 게 더 바람직하다. 두 학교 합쳐 1억원만 쓰자.”

사진 찍기를 극구 사양한 누님... 불문율 깨다

누님이 고집 좀 부려도 동생 말은 잘 들어준다. 이렇게 누님 돈에 동생 뜻을 얹어 우선 원광대학교에 발전기금 5천만원, 국경선평화학교에 장학금 3천만원 건네게 됐다. 원광대학교에서 기금 전달식 갖고 싶어한다고 했더니 극구 사양했다. 2억원쯤 계획하다 5천만원만 내는 게 낯부끄러운 데다 그걸 생색내는 건 질색이라면서. 학교 홍보를 위한 행사라 참석하는 게 좋고, 사진은 마스크 쓰고 찍으면 된다고 했더니 미장원에서 머리 손질받고 내려왔다. 조카 결혼식에도 불참할 만큼 사진 찍히기 끔찍스레 싫어하지만, 다양한 모습의 사진도 많이 남겼다. 코로나19 마스크 덕분에. 이 세상에 연자 누님 같은 사람 또 있을까.

편집부 gcilbo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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