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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아, 백기완 선생님... 이젠 편히 쉬소서

기사승인 2021.02.16  01: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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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재(본 신문 발행인, 철학박사)

오늘(2월 15일) 아침 일찍 백기완 선생의 부고를 접했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해 계시다는 소식은 여러 경로를 통해 들었습니다만 코로나19로 뵙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잠잠해지면 가까운 동지들과 병문안을 가기로 약속해 두었는데... 이렇게 가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백 선생님은 우리 후배들에게 만년 청년으로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청년 때의 기백이 고스란히 유지되고 있는 이유가 클 것입니다. 사람들은 맑고 젊은 정신을 육신의 강건함과 혼동하는 우(愚)를 종종 범합니다. 또 일평생 민중적 삶과생각이 변하지 않은 것도 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뒤에 뉴스를 찾아보니 오늘 새벽 4시 45분에 영면에 드셨다는군요. 진영을 가리지 않고 백 선생님에 대한 애도의 마음이 넘칩니다. 이 땅의 민주주의를 논할 때 백기완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는 제1 야당 논평도 보입니다. 국민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드는 데 대한 선생의 헌신을 언급한 것으로 보입니다.

1970년대 후반, 대학 다닐 때 책 한 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필력과 내용 면에선 투박하지만 힘이 있었습니다. 제목이 꽤 길었지요. <자주 고름 입에 물고 옥색 치마 휘날리며>였는데, 딸에게 주는 편지 형식의 글 모음입니다. 남존여비, 장유유서의 유교적 습속을 탈피하고 민중적 사유를 갈파한 글이었습니다.

'딸에게 주는 편지' 형식의 수상록인 <자주고름 입에 물로 옥색 치마 휘날리며>는 조태일 시인이 대표로 있던 시인사에서 출판되었다. 한참 뒤 도서출판 한울에서 재출간되었다.

'자주 고름을 입에 물고 옥색 치마를 휘날리며' 말을 타고 만주 벌판을 휘달리는 딸은 백 선생님이 바라는 한국의 여인상이라고 해도 지니치지 않을 것입니다. 페미니즘에 기초한 여성운동을 서양과 연결 짓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백 선생님은 지극히 한국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주창하며 실천했습니다.

우리 한국의 사회운동을 말할 때도 백기완 선생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보통 사회운동 1세대로 문익환 계훈제 백기완 선생을 듭니다. 이 세 분 모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백 선생님은 여러 영역의 운동을 하나로 아우르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지역과 부문을 가리지 않고 선생의 말을 무게감 있게 받아들였으니까요.

1987년 12월12일 백기완 당시 대통령 후보가 서울 대학로 유세장에서 수많은 지지자를 향해 열변을 토하는 모습 ⓒ 연합뉴스

세월이 흘러도 민중은 집회를 통해 주장을 펼치고 생각을 관철하려 할 것입니다. 민중 집회에서 사자후를 토하며 흩어진 힘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분 중 백기완 선생만한 분이 또 있을까요. 백 선생님의 신기에 사로잡힌 듯한 연설을 듣고 뒤풀이 장소에서 선생님의 명연설은 1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실력이라고 말하면, 김 모는 천년에 한 번 만날 수 있는 명연설이라고 하던데...? 이렇게 응수하시곤 했지요.

아닌게 아니라 집회장엔 백 선생님이 모습만 보이는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살아났습니다. 여든이 넘어서고부터 거동조차 힘들어 하셨습니다. 주최 측이 사람들을 보내 부축을 하면서까지 선생님을 모시기에 공을 들였습니다. 인간적 정리(情理)로 볼 때 놓아드려야 하지만 집회의 성공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집회를 담당한 경찰 책임자도 백 선생님의 참석 여부를 맨 먼저 체크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분은 집회에 그만큼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운동가를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워낙 행동에 출중하다 보니까 백 선생님의 이론을 무시하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선생을 염두에 둔 선입견일 것입니다. 하지만 선생은 독학으로 한•중•일영 4개 국어가 가능했으며 순수한 우리말 애용자로 한자를 쓰지 않아서 그렇지 한문 실력도 상당한 수준이었습니다. 선생이 쓴 책만 해도 20권이 넘습니다. 이것으로도 그분에게서 이론이 얕다는 말은 삼가야 합니다.

백기완 선생의 원작으로 알려진 '임을 위한 행진곡' 필사본

1980년 광주민중항쟁 이후 줄곧 크고 작은 집회장에 울려 퍼진 민중가요가 '임을 위한 행진곡'입니다. 이 노랫말의 원작자가 백 선생님이라는 사실은 꽤 알려져 있습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로 시작하지요. 광주민중항쟁 때 전사한 시민군 남녀의 영혼결혼식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노래입니다. 대동의식을 일궈내는 데 이것 이상의 노랫말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이런 노랫말은 관념의 산물이 아니라 작자가 현장의 중심에 서 있을 때 가능합니다.

지난 얘기지만 1987년 대선은 민족민주 진영에게는 대단히 아쉬운 한 판이었습니다. 박정희-전두환에 이어 노태우 군부 정권의 연장이냐 종식이냐의 갈림길에 서 있었지요. 김대중-김영삼이 단일화만 되면 승산이 큰 선거였는데, 결국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여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게 했습니다.

그 때 백 선생님은 양김의 후보 단일화의 가능성이 많았다면 주위에서 아무리 강권해도 독자 후보로 나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워낙 팽팽한 두 후보(김대중-김영삼)에 대해 본인(백 선생님)이 사퇴를 하면 단일화의 불쏘시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결단을 내렸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지요. 정권을 갖다 바친 격입니다.

백 선생님은 불의한 정권을 반대하는 데에도 앞장섰습니다. 10 여 차례에 걸친 감옥 생활에서 당한 고문으로 몸이 만신창이가 되다시피 했습니다.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을 달고 살았습니다. 고통을 조금이라도 달래볼 목적으로 환갑이 지나고 나서 시간 나는 대로 산에 올랐습니다. 산행 후 음식점에서 먹는 숯불고기는 아직도 감칠맛 나는 메뉴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백 선생님에 대해 쓸 내용은 무척 많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기 위해 농촌으로 내려오고 난 뒤 아무래도 뵐 기회가 뜸했습니다. 아마 선생님과 동고동락한 지인들이 쏟아낼 남겨야 할 이야기가 꽤 있을 것입니다. 나머지 얘기는 그분들에게 맡기고 선생님의 후배 아낌, 동지 사랑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고 글을 마치려 합니다.

백기완 선생은 여러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운동가들의 주례를 기꺼이 맡아 주었다. 그의 주례사에는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을 위해 헌신할 것을 담고 있었다.

백 선생님에게 결혼식 주례를 부탁하는 활동가들이 많았습니다. 기층 민중 운동 쪽 사람들뿐 아니라 학생운동 사회운동 등에서 활동하던 운동가들의 부탁이 줄을 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무척 어려운 부탁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백 선생님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주례 복이 자기만큼 많은 사람도 드물 것이라며 너털웃음을 터트리시곤 했습니다.

백기완 선생과 동시대를 호흡한 것에 대해 고마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정말 역사와 함께 호흡한 걸출한 인물입니다. 그분의 우렁찬 목소리도, 웃음소리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것에 힘이 빠집니다. 백 선생님의 상징처럼 보이던 헝클어진 머리카락의 모습도 이젠 사진 속에서나 볼 수 있겠지요. 그렇다고 손 놓고 자탄만 하고 있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백 선생님이 못다 이룬 세상을 향해 남은 자들이 매진해야 할 때입니다. 한 사람으로 부족하면 열 사람으로, 열 사람으로도 부족하면 백, 천, 만의 사람들이 몫을 나누어 메야 할 것입니다.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위해, 민중이 향상된 삶을 위해…. 백 선생님의 타계는 이런 다짐을 요구합니다. 대한민국의 민중 민주 통일 운동에 남긴 선생님의 족적이 너무 큽니다.

백기완 선생님, 고마웠습니다. 이 풍진 세상 고통 내려놓으시고 편안한 저 세상에서 영면을 취하소서.

이명재 lmj228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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