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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후배 허인범의 쾌유를 빌며....

기사승인 2020.10.12  09:4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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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재(본 신문 발행인, 철학박사)

주일 사역 마친 뒤 강대상 앞에 엎드리다

오늘(10월 11일) 주일 사역을 모두 마치고 강대상 앞에 엎드려 무릎을 꿇었습니다. 계속 마음에 품고 있던 한 후배를 두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저에게 이런 경우가 자주 있는 건 아닙니다. 간절함과 절실함이 몰려왔습니다.

그가 아프다는 소식을 접하고 잠간 잠간씩 간헐적으로 기도해오긴 했지만 장시간 기도하기는 처음이어서 흠칫 놀랐습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란 복음성가가 귓가를 때렸습니다. 기도 중간 중간 이 노래를 중얼거렸습니다.

사랑하는 후배 허인범의 건강했을 때의 모습

암울한 1980년도 초반, 이 후배를 만나다

이 후배를 처음 만난 것은 1980년대 초반으로 기억합니다. 정확한 연도는 잘 모르겠습니다. 박정희가 죽고 12.12 쿠데타로 전두환이 정권을 탈취하고, 광주사태가 뒤를 이은 격동의 시대에 그 후배는 야학을 찾아왔습니다. 노동자들과 함께 지내고 싶다고….

1980년대 초반은 대학교 내의 학생운동이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시대상황이 뜻있는 대학생들을 야학으로 모이게 했습니다.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권 이후처럼 학내운동이 제 모습을 찾았다면 아마 노동자 학습의 장인 야학을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때의 야학이 대학생 교사(일반적으로 講學이라고 부름)를 쓸 때에는 신분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 필요했습니다. 그런 과정 없이 교사로 받아 주었다가 낭패당할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프락치가 신분을 위장하고 들어와 야학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경우도 없지 않았습니다.

6명의 대학생이 야학 교사를 자원하다

그래서 보통 야학 교사로 활동하는 사람이 소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배는 이런 과정을 거쳐 야학과 연(緣)을 맺은 게 아닙니다. 아무 연고도 없이 스스로 찾아 왔습니다. 그것도 그 한 사람이 아니고 6명이 야학 교사를 하겠다고 함께 찾아 온 것입니다.

이 후배의 대학 선배 한 분이 야학을 이끌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사방으로 선을 대어 알아본 뒤 믿을 만한 사람들로 판단하고 어렵게 교사로 받아들였습니다. 같이 야학 활동을 하기로 했지만 팀으로 들어온 이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기존의 교사들과 차이가 났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이 야학의 방향성을 문제 삼았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두 가지 방향을 설정하고 노동자 학생(이들을 學講이라고 부름)들을 지도했습니다.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학생에게는 교과 과목에 비중을 두고 가르쳤습니다.

노동운동을 할 학생들에겐 노동법, 노동의 역사, 한국 근현대사 등 운동에 필요한 과목에 비중을 두고 야학을 운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딱 구분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혼재되어 공부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대검까지 합격하고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도 있었고, 야학을 졸업하고 노동운동을 하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성당 지하 교실 세 칸을 빌려 슬기 사랑 굳셈이란 반 이름을 정하고 야학을 했다.

야학의 방향성 문제로 격한 토론을 하다

그 후배를 리더로 하는 새로 들어온 팀에서 이것을 문제 삼은 것입니다. 검정고시 야학보다 시대가 더 요구하는 것이 노동야학이라는 겁니다. 내부 논쟁이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이어졌습니다. 이 문제로 MT도 여러 번 갔습니다. 갈 때마다 밤을 새워 토론을 해야 했습니다.

논쟁의 결과 나온 결론이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정리되었습니다. "야학은 전통대로 계속하되 고등부란 이름의 노동야학을 만들기로 한다." 그 후배를 리더로 하는 6명의 교사에 기존 교사 몇 명이 합류해 고등부 노동야학을 가동했습니다. 합리적인 대안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면 고등부 노동야학이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습니다. 3기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중단되었으니까요. 이 후배는 그 때 고등부 노동야학을 짊어지고 가는 입장이었습니다. 교재를 만드는 것에서부터 학생을 모집하는 일까지 책임을 전적으로 떠맡고 있었으니까요.

그때 보여 준 이 후배의 리더십이  '섬김(servant)'이었습니다. 후배들을 섬기는 자세로 솔선수범해서 일을 처리했습니다. 후배들이 미안해서 도울 정도로 말입니다. 요즘 주류 조직론에서 말하는 ‘서반트 리더십’을 이 후배는 1980년대 초반 언더 그룹에서 몸소 실천한 셈입니다.

‘서반트 리더십’으로 야학을 이끌다

그때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이 그에 대해 공통으로 평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 솔선수범하는 사람, 화를 낼 줄 모르는 사람,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 이 정도의 사람이면 운동(movement)의 지도자로서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저는 5년 야학 생활을 정리하고 바깥의 시민운동에 관계하게 되었습니다. 1980년도 중반기 때였습니다. 저의 자취방으로 그 후배가 찾아왔습니다. “형님 집에서 보름 정도 지낼 수 없겠느냐”고 물어왔습니다. 두 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는 경찰에게 쫓기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요.

노학 연대투쟁은 1970년 전태일 열사 분신 사건으로 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1970년도 중반기부터는 야학이란 공동 학습장이 만들어져 노학 연대투쟁의 훈련기를 가졌습니다. 그러다가 1986년을 맞았습니다. 그 한 해 전이었지요. 김대중 김영삼이 중심이 된 신한민주당이 창당되었고, 12대 총선에서 제1야당이 되었습니다.

국민들의 생각에 그들이야말로 야당다운 야당으로 판단하고 표를 몰아 준 거지요. 여기엔 당시 재야 운동권과 학생 운동권의 지지가 큰 몫을 했습니다. 그러나 86년 5.3 인천사태에서 이 두 운동 그룹은 신한민주당으로부터 배척을 당한 꼴이 되었습니다.

5.3인천사태. 재야 및 학생운동권 세력이 국민헌법 제정과 민중회의 소집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했다(경향신문 DB 사진)

보수 야당에게 버림을 당한 격인 노동-학생-재야 운동권

기층 민중을 일정 부분 대변해 줄 줄 알았던 그들도 보수의 틀을 깨지 못하고 여러 부문의 운동 단체와 거리를 두었습니다. 도리어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고 호흡을 맞추려고 애 썼습니다. 노동운동권은 말할 것 없거니와 재야 및 학생운동권이 반발했습니다.

이때 학생운동권의 많은 활동가들이 노동 운동과 손을 잡고 노학 연대투쟁을 준비했습니다. 대학 운동권 출신들이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현장으로 투입되었습니다. 이런 활동가들로 조직된 경인지역의 대표적 노동운동 단체가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노련), 성수노동자해방투쟁위원회, 노동자해방동맹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들이 비밀리에 만든 조직이 전국노동자연맹 추진위원회입니다. 노동운동을 하기 위한 비밀 지하조직이었지요. 그 후배는 성수지역 노해투 조직원으로서 이 비밀 노동조직에 가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곧 발각되어 지도부가 구속되었고, 1백 명이 넘는 조직원들이 수배를 당했습니다.

전국노동자연맹 추진위 사건으로 수배 받다

그 후배가 아무 사전 연락도 없이 내 자취방을 찾아왔습니다. 보름만 머물게 해 달라는 거였어요. 그가 전노추위 사건으로 수배를 당했을 때였습니다. 보름을 얘기했지만 그 후배는 그 절반쯤 숨어 지내다가 한 마디 말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소식이 끊겼습니다. 궁금함만 안은 채 시간이 흘렀습니다.

새 천 년이 시작되고 10년이 지날 즈음 그가 나타났습니다. 야학 출신 사람들의 송년 모임 때였습니다. 매년 연말 야학에서 맺은 인연을 나누는 송년회를 갖고 있었지요. 이 모임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교사와 학생 가릴 것 없이 매년 3,40명이 모여 한 해를 마무리합니다.

나타난 그 후배는 얼굴에 보기 좋게 살이 붙었고, 차림새도 운동을 하던 때의 모습에서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사업가로 변신해 있었으니까요. 보험 사무실을 차려 놓고 꽤 높은 실적을 올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수입이 그만큼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산을 쓴 허인범의 흑백 사진이 좀 쓸쓸하게 보인다.

부산-서울-광주에 보험 사무실을 두다

그는 부산에서 시작해 서울과 광주에까지 사업을 확장했습니다. 그야말로 불철주야 동분서주했습니다. 이때 몸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것이 치명적인 병인(病因)이 아닌가 싶습니다. 건강에 대한 지나친 확신도 한 몫 했을 거구요. 하지만 그는 그런 사정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야학 모임에 열심이 참석하며 생각과 정을 나누었습니다. 보험 일을 보다 체계적으로 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해서 공부를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대학에 강의를 나간다고 했습니다. 또 부산의 한 달동네에서 아이들을 모아 무료 도서관을 운영하고, 학습 지도 하는 일을 한다고도 했습니다.

그런 뒤, 한 모임에 그는 핼쑥한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좋지 않은 소식이라면서 암 수술을 받고 치료 중이라고 했습니다. 화를 낼 줄 모르는 그, 낙천적인 인생관을 갖고 있는 그에게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모습에서 세월의 무상함을 생각했습니다.

항암 치료를 받으며 활동의 폭을 줄이다

그 뒤, 서울을 오르내리면서 항암 치료를 받고 있고,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는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이즈음 그의 입에서 건강의 중요함에 대한 단어가 많이 튀어 나왔습니다. 서울과 광주 사무실을 정리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잘 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건강할 때의 활기찬 모습을 다시 찾은 것 같아 기뻤습니다.

부산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바쁜 시간 틈을 내어 그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쏜살같이 달려왔습니다. 겉으론 건강하게 보였습니다. 비교적 긴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달동네에서 진행해 온 아동도서관 및 무료 학습지도 일은 후배들에게 맡기고 새로운 봉사의 일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후배들에게 맡기고 손을 뗐다고 했지만, 운영 방향을 두고 후배들과 마찰이 있어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한참 뒤에야 알았습니다. 물질을 혼자 조달하다시피 했고 시간을 내어 혼신을 다한 봉사의 일을 타의로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는 것의 아픔은 당해 본 사람만이 압니다.

허인범이 주도해서 세운 문화복합공간 '다온'. 이곳은 회원이 주인인 공간이다. 정기적으로 강사를 초청해서 강의를 듣고 토론을 하면서 시민의식의 변화를 꽤했다.

새로운 봉사단체, 복합문화공간 ‘다온’

그 뒤 새로운 활동 공간을 마련했다고 했습니다. 봉사의 사람은 잠시도 쉴 수 없는 법인가 봅니다. 부산의 한 지역에 복합문화공간 ‘다온’의 문을 연 것입니다. 삶에 활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람을 초청해 정기적으로 강의도 하고 토론도 하는 공간이었습니다.

이용하는 회원이 곧 주인인 ‘다온’의 벽에는 이런 안내문이 붙어 있습니다. “차와 음악과 공간 사용은 회원님껜 언제나 무료입니다.” 암세포와 동거하면서도 이 일에 혼신을 다 했습니다. 시민들의 의식 함양과 지역의 변화를 기대하면서 책임감을 갖고 그는 정성과 사랑을 쏟아 부었습니다.

농촌목회를 하는 나의 입장에서 자동차 보험은 은근히 부담이 됩니다. 그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한 날 그에게 연락을 취했습니다. 저렴하지만 보상 조건이 좋은 것으로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이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가입 완료했으니 보험료는 형편이 닿는 대로 보내 달라는 겁니다.

자동차 보험료를 대납해 준 착한 후배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도 그가 운영하는 보험 사무실과 계약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몇 달 전입니다. 그에게서 장문의 문자가 왔습니다. 무거운 소식을 전하게 되어 죄송하다는 말로 그 문자는 시작되었습니다. 암이 담도까지 전이되었고 병원에서 수술할 단계는 지났다는 우울한 소식이었습니다.

담도암 말기(4기)라고 했습니다. 항암치료를 계속해 왔는데 자연치유요법 등 다른 방법을 강구해서 기어이 암을 이겨내겠다고 했습니다. 구충제를 사용하는 것도 고려 중이라고 했습니다. 눈물이 나오려 했습니다. 마지막 단계까지 가 있구나! 어떤 방법을 쓰든 암 세포를 물리치고 나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후배를 위한 기도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후배 허인범! 소식을 듣고 한 후배가 말했습니다. ‘좋은 일 많이 하고 선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왜 이른 나이에 이런 고통을 받아야만 하느냐구요’. 맞습니다. 기도밖에 할 수 없는 제가 한스럽습니다. 하나님, 인범이를 낫게 해 주옵소서! 다시 한 번 이 세상을 맑고 밝게 만드는 데 도구로 사용해 주시옵소서!

야학 출신 학생 교사들이 오늘날까지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은 지난 어느 해의 송년 모임을 마치고 찍은 기념 사진(앞줄 맨 왼쪽이 허인범)

담도암 말기인 후배를 위해 기도하다

지금 인범이는 괴롭고 힘든 시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대화하기를 좋아하는 그가 오죽하면 전화 말고 문자만 달라고 했을까요. 그러면 틈틈이 읽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에게 성경을 한 권 보내고 싶은데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군요. 지금 있는 곳도 모르고 물어볼 용기조차 나지 않습니다.

민중을 이야기하며 사회 변혁의 필요성을 밤새 토론하던 그, 생활의 기반을 갖추고 대학을 다니면서도 늘 노동자 등 기층 민중을 대변했던 그, 40년 가까운 세월을 역산(逆算)하면서 천하를 호령하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후배 인범과 관계한 그 때가 시리도록 그립습니다. 인범아, 일어나라 어여 벌떡!

* 이 글을 쓴 목적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오직 인범의 완쾌를 빌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적어내려갔습니다. 사랑하는 인범의 쾌유를 위해 두 손 모아 주시기 바랍니다. 여기 올린 사진은 허인범 페이스북에서 가져온 것임을 밝힙니다(필자 주).

이명재 lmj228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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