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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기사] 꿈과 현실의 경계선 위에서-청악서실(靑岳書室) 방문기

기사승인 2020.03.10  22:3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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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옛 소설 중에 <침중기(枕中記)>라는 게 있다. 당나라 현종 때의 사람 심기제(沈旣濟)가 썼다. 현실과 몽중(夢中)을 경계로 하고 양 쪽 세계를 대비해 리얼하게 설명해 주고 있는 소설이다. 청악서실(靑岳書室)을 방문하고 난 뒤의 느낌이 딱 이것이었다. 바깥은 현실이었고 안은 꿈의 세계...

서로 시간이 잘 맞지 않았다. 서예로 일가를 이룬 청악(靑岳, 이홍화 선생의 아호)은 유명한 분이어서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오늘(3월 10일) 오후 시내 나간 길에 전화 통화를 시도했다. 마침 성내동 서실을 지키고 있었다. 청악은 작년 김천의 향토 장인으로 선정되었다. 물론 서예 부문이다. 허나 그는 김천을 넘어 대한민국의 장인으로도 손색이 없는 사계의 실력자다.

서예는 글씨로 마음과 생각을 전달하는 예술이다. 글씨를 쓰는 도구는 붓이다. 각종 붓이 서실에 가지런히 걸려 있다. 이 붓들은 청악이 그동안 사용한 붓 전체에서 극히 일부분에 해당한다. 서예가로 이어 온 40년 넘는 삶에서 사용한 붓의 1/100쯤이나 될까. 그야말로 조족지혈(鳥足之血)이다.

행사장 등지에서 나눈 지나가는 인사를 뺀다면 청악 선생과 일대일 대면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작년에 그는 '김천일보'라는 제호를 직접 써서 보내주었다. 고마운 마음이 작동해 오늘 발걸음을 한 것인데, 그는 많이 여의어 있었다. 서실 계단을 내려가다 발을 헛디뎌 한 달 넘게 병원 신세를 졌다고 했다.

 '붓을 친구 삼아 반 세기!' 짧지 않은 기간이다. 그동안 많은 일들이 그의 예술에 배태되어 있음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의 무대는 김천을 넘어 한반도 전체였다. 예술의전당에서 두 번에 걸쳐 개인전을 했고, 대통령 취임식 등 크고 작은 행사에서 서예 퍼포먼스로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청악은 이 영역의 대가로 이미 자리매김하고 있다.

3층 작업실, 2층 전시실, 1층 작품 보관실... 글머리에 <침중기>를 들먹이며 '한단지몽(한鄲之夢)' 유사한 얘기를 했는데 청악서실을 구경하고 나오니 한 바탕 꿈을 꾼 것 같았다. 보물창고라고 할까, 아니면 만물상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정신의 집합소라는 점이다. 그 정신은 청악 선생이 사랑과 정성으로 쌓은 탑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훌륭한 작가는 자유자재의 예인(藝人)이 되어야 한다. 그와 대화하면서, 조선 말 서예가이자 금석학자였던 김정희가 '추사체'로 글씨를 특화했듯이, 몇 년 전 타계한 신영복이 '쇠귀체'를 창안했듯이 이홍화 선생도 '청악체'로 등록을 하라고 말을 건넸다. 그러나 이것은 청악을 모르고 한 소리였다. 그는 서화각(書畵刻)에 두루 통달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화가 이중섭에게 캔버스뿐 아니라 심지어 담배 갑의 은박지까지 화판이 되었듯이 청악에겐 도구와 필기구, 서체와 글씨의 크기뿐 아니라 쓰는 장소까지 자유자재, 능수능란하다. 여기에 만나는 사람까지 대통령과 국무총리에서부터 농촌에 거주하는 필부인 나와 같은 사람까지 폭이 무척 넓다. 진정한 예인의 경지에 진입해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각종 나무에 옻칠을 하고 그 위에 글씨를 쓴다는 것은 지난한 작업이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청악은 이런 작업에 임할 때는 오랜 시간 기도로 준비한 뒤 마음을 가다듬는다. 사용된 서화판(書畵板)도 다양하다. 크고 작은 접시가 있는가 하면 목재로 쓰다 남은 나무판도 있다. 자유자재 예인의 기지가 엿보인다.

서예가로 알았다가 문인화가인 줄 알았고, 문인화가인 줄 알았다가 훌륭한 전각가임을 알았다. 이 정도면 완당 김정희의 길을 답습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라.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냥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독창적인 경지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술은 모방인 동시에 창조라는 명제를 청악은 잘 보여주고 있다.

종이 나무 베 돌 독... 무궁무진한 재료들이 청악에겐 서화판의 재료가 된다. 베 중에서 모시라고 예외가 될 수 없다. 10m는 족히 되어 보이는 모시 위의 글과 그림이 시원시원하다. 여름에 보면 제 격이리라. 종이가 발견되기 전에는 베로 만든 두루마리 위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몇 백 년을 거슬러 올라 가 있는 느낌이었다.

청악 선생이 쓰고 있는 작업실이자 전시장 그리고 작품 보관소 역할을 하는 이 건물은 원래 농협 시지부가 사용했다고 한다. 그것을 임대해서 쓰고 있는데, 비용은 오롯이 청악 선생의 몫이라고 한다. 개인이 부담하기엔 어려움이 따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악이 내색하지 않았지만 옆에서 보기에... 

장인(匠人)은 그 분야에서 최고 경지에 오른 사람에게 붙여 주는 명칭이다. 명예의 상징이긴 한데 이런 장인들에게 자치단체나 정부에서 달리 해 줄 건 없을까. 예술 하는 사람은 작품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따라서 작품이 널리 알려지기를 바란다. 이런 바람이 문학작품을 책으로 출판하고, 음악을 CD로 제작하고, 미술은 전시함으로 대중과 만난다.

이런 1회적인 행사를 넘어 자신의 작품을 반영구적으로 전시해서 미래 세대에게 법고창신(法古創新)의 디딤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직지문화공원에 세워진 백수문학관도 이와 같은 목적을 갖고 있다. 청악의 개인 작업실과 전시실 그리고 보관 창고를 둘러보고 든 생각은 지자체에서 가칭 '청악서화각기념관(靑岳書畵刻記念館)' 같은 것을 설립해 그의 작품을 전시보관하면 김천의 격을 한 단계 높이는 것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1층 작품 보관실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사람이 아니라 작품으로... 이런 때에도 입추의 여지가 없다는 표현을 써도 되는지... 청악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초창기 수분(水分)에 의해 작품을 버린 뒤 가습기로 매일 24시간 물기를 가시게 하고 있다. 가습기 한 대로 시작했다가 두 대, 지금은 석 대가 쉴 틈 없이 수분과 싸우고 있다고 한다. 그는 이런 사실을 가볍게 말했는지 모르지만 청자(聽者)의 입장에서는 무겁게 다가왔다.

청악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 보았다. 지자체 또는 중앙 정부가 기념관을 건립해 준다면 수많은 작품들을 무상 기증할 의향이 있느냐고... 그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OK!'했다. 문화의 중요성이 나날이 증대되고 있는 때에 지자체와 중앙 정부는 진지하게 연구 검토해 볼 만하지 않을까.

위 사진 설명을 마지막으로 붓을 놓자. 문방사우(文房四友)의 하나인 벼루 위에 김용택의 시 '당신의 앞'을 써 놓고 있다. 예인의 기지가 돋보인다(취재 / 이명재 발행인).

 

(취재/이명재 발행인).

취재부 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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