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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기] 힘든 여정, 그러나 거뜬하게 감당한 이 사람!

기사승인 2019.08.24  15:4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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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건강할 땐 전국을 주유(周遊)했다. 따라만 다녀도 눈요기가 쏠쏠했다. 베풀기 좋아하는 그의 곁에 있기만 해도 몸과 마음이 풍성해졌다. 강원도로, 충청도로 그리고 경상도로... . 행선지 중에 유독 전라도가 많은 이유는 기독교 유적지가 곳곳에 산재해 있는 탓일 게다.

원래 8월 15일 광복절 날 김천 우리 교회를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하루 전에 몸이 안 좋아 방문이 어렵게 되었다고 했다. 다시 김천 방문 날짜로 잡은 것이 8월 20일(火)이다. 오전 7시에 출발했지만 정오가 다 되어 도착했다. 중간에 쉬어 가면서 온 때문이다.

박 목사님 내외가 추석 전에 무리를 해서 온 이유가 있다. 유 권사는 선물용품을 납품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그 물품 중 일부를 명절 또는 교회 행사가 있을 때 보내어 전도 용품으로 쓰도록 한다. 주로 작은 교회가 그 대상인데 박영복 목사님에게 그 결정권이 있다고 한다.

추석 명절을 앞두고 그 선물을 차에 가득 싣고 온 것이다. 주로 생필품이다. 성도들에겐 추석 선물로 그리고 이웃사람들에겐 전도 선물로 안성맞춤의 것들이다. 몇몇 교회와 나누어 돌아오는 추석 때 쓰려고 하니 기분이 좋다. 선물이라는 건 묘하다. 받는 사람과 주는 사람 양쪽을 모두를 기분 좋게 만드니 말이다.

박 목사님은 지금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다. 아니, 옆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한 발짝도 못 움직인다. 휠체어를 타는 것도 도움을 받아야 가능하다. 그것은 오롯이 사모님의 몫이다. 몸무게 90Kg이 넘는 육중한 몸을 돌보는 게 여간 힘들지 않을 텐데 한 마디 불평도 하지 않는다. 주위에선 천사가 따로 없다고들 말한다.

하반신 마비가 오기 전에 박 목사님과 나는 나라 안 주유(周遊)를 넘어 세계를 철환(轍環)할 것을 계획했었다. 필리핀도 가고 동남아도 가고, 일본과 미국을 거쳐 초대교회의 흔적을 찾는 여로(旅路)를 시간 나는 대로 함께 짰었다. 그러나 박 목사님이 벌떡 일어나 걸을 수 있을 때까지 보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를 위해 두 손 모아주시면 고맙겠다.

"목사님, 15일 광복절 날 오지 못해 미안해요. 몸이 아파 움직이지 못한다고 했지만 실은 마음의 아픔 때문이었어요. 목사님 다른 약속도 취소하게 하고 잡은 건데..."

박영복 목사님은 말더듬을 극복하고 목회자가 되었다. 성경에서 취한 이름이 말더듬이 모세가 아니라 그를 도와 대변인 역할을 한 모세의 형 아론이다. 나도 처음엔 그의 본 이름이 '박아론'인 줄 알았다. 한 교회 사찰 집사로 섬기다가 신학을 해서 목회자가 된 사람 박영복, 아는 사람들은 그를 입지전적 인물이라고 말한다.

그는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요 어머니의 기도 덕분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의 눈물 나는 노력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으리라. 박 목사님 부부를 최고로 모시고 싶지만 마음뿐이다. 또 그런 것을 좋아할 박 목사님과 사모님이 아니다. 그래도 형식을 갖추고 싶어 직지파크호텔로 가서 모밀국수 세트를 시켰다. 초밥•만두•튀김까지 골고루 나온 음식이 구미에 맞았다.

커피까지 마시고 호텔을 나왔다. 직지문화공원을 둘러보려다가 행선지를 산내들공원으로 돌렸다. 부항댐을 중심으로 조성한 관광지가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박 목사님 내외에겐 처음 가보는 곳이어서 마음을 정하기 쉬웠다. 바람재를 넘어 굽이굽이 산길을 돌았다. 운전이 어려운 굴곡지고 좁은 길이지만 힐링 코스라며 좋아했다. 참으로 덕담에 능한 사람들이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좀 한산한 느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는 날이 장날이다. 공원 휴장의 날이었다. 토요일과 일요일에 찾는 사람들이 많아 근무를 하고 대신 월요일과 화요일 쉰다는 것이다. 아쉬웠지만 바깥에서 포즈를 잡고 사진을 찍었다. 방문 표시로 매점에 가서 브라보콘 하나씩을 사서 먹었다. 어릴 때부터 친구였던 브라보콘, 그 연륜이 짧지 않은 상품이지 아마.

벌써 오후 5시 30분을 넘고 있었다. 저녁 식사할 음식점을 궁리하고 있었더니 간편하게 김밥이면 좋겠다고 했다. 우리의 형편을 배려한 말이라는 걸 모르는 바 아니다. 오는 길에 오단이김밥에 들려 넉넉하게 5인분을 샀다. 아내는 어디서 들었는지 오단이 김밥집이 구멍가게에서 시작했는데 이렇게 커졌다고 했다.

"김천에서 내세울 만한 농산물이 뭐죠?"(박영복 목사)

"예, 포도와 자두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이명재 목사)

"이 시각에 구경할 만한 곳이 있을까요?"(박영복 목사)

교회 근처에 있는 농산물 전문 판매점 본향텃밭으로 안내했다. 포도와 옥수수를 차에 실었다. 밥을 먹지 않아도 옥수수만 있으면 오케이(OK!)라고 했다. 며칠은 식사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다며 좋아했다. 가난해서 끼니 잇기가 힘들 때 옥수수는 감자 고구마 등과 함께 식사 대용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른바 구황식품(救荒食品)이다.

교회로 와서 잠시 쉼의 시간을 가졌다. 선교비를 못 드려 죄송하다며 봉투 2개를 내밀었다. 하나는 이웃 교회에 전달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선교가 몸에 밴 사람이다. 건강이 좋지 않아 30년 목회하던 교회를 은퇴하고 지금은 부천에서 가정교회를 하고 있다. 외국인 중심의 다문화 목회인데 담임은 박희숙 목사(사모님)이고 박영복 목사님은 사부(師夫) 역할에 만족하고 있다.

소수의 다문화 성도로 사역을 하면서 선교는 끊이지 않는다. 지금도 베트남 두 곳의 교회에 매달 선교비를 보내고 있다. 적은 액수여서 부끄럽다고 말하지만 이건 과부의 두 렙돈 연보만큼 귀한 것이다. 없는 가운데 전부를 바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박영복 목사님 부부를 생각할 때마다 큰 도전을 받는다. 목회자다운 목회자가 흔치 않은 사회여서 더 그렇다.

자동차를 타고 내릴 때도 큰 고역을 치러야 한다. 휠체어를 옮기는 데에도 적지 않은 힘을 필요로 한다. 이 모든 게 박희숙 목사님이 해내야 한다. 옆에서 도우려고 하니까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요령으로 하는 거라며 타이르듯 알려준다. 밤 8시가 다 되어 출발했다. 헤어진다는 건 늘 쓸쓸하다. 밤 11시에 박 목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목사님, 오늘 정성을 다해 섬겨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이제 막 귀가해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계단 오르는 것은 아들과 사돈이 와서 도와주셨어요. 피곤하실 텐데 푹 쉬세요."(이명재 목사 記)

이명재 lmj228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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