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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차 1진 남북이산가족 상봉기

기사승인 2018.08.29  21:4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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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장원(자은신광교회 담임목사)

자은신광교회 최장원 목사는 8월 20일~26일 금강산 면회소에서 진행된 제21차 1진 남북이산가족 행사에 참가하였다. 그의 표현대로 5만7천분의 89라는 바늘귀를 통과하고 이산가족 상봉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최 목사의 부친 최동규 목사는 1.4후퇴 때 월남하여 오랜 세월 정든 고향을 그리며 살아야 했다. 최장원 목사가 이번 이산가족 상봉행사에 아버지를 모시고 참가하고 와서 느낀 소감을 글로 정리해 보내왔다. 비교적 긴 글이지만 생생한 현장을 느낄 수 있으니 완독해 주시면 좋겠다. 통일은 남의 얘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다(편집자 주).

 

1. 글을 시작하며

꿈만 같은 이산가족 상봉이 끝났다. 언제 만났었나 싶게 벌써 기억이 아련하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상봉 대상자 선정 소식을 듣고도 긴가민가하였다. 5만 7천분의 89라는 엄청난 경쟁률에 당첨된 것이기에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장남으로써 아버지를 모시고 다녀와야 한다는 현실적인 생각에 교회를 비워야 한다는 부담이 앞선 것은 그러한 꿈을 깨어버리기에 충분하였다.

사실 어찌 보면 이는 예견된 일이었는지 모른다. 한 두어 달 전에 아버지가 전화를 하셔서 북에 있는 주애 고모와 통화를 하셨단다.(아버지는 1.4 후퇴 때 북에 최주애, 최송애 두 여동생을 놓아두고 탈북하셨다) 최근 깜빡깜빡 하시곤 하는 아버지의 기억력을 의심하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휴대폰 통화내역을 수소문하였다.

적어도 주애 고모가 전화하신 것이 사실이라면 탈북을 하셨을 것이고, 중국이나 하나원 등과 관련된 전화번호가 찍혀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해프닝으로 끝났다. 관련된 곳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후에 주애 고모는 20년 전에 돌아가신 것으로 판명이 남으로써 아버지의 희망사항으로 끝이 났다. 

아무튼 이러한 해프닝이 수면으로 갈아 앉을 무렵 적십자사로부터 연락이 왔던 것이다. 북쪽의 동생 중 최주애는 20년 전 사망하였고, 최송애는 운신 불가능한 상태라고 했다. 그래서 최주애의 딸 박춘화(58)와 아들 박성철(47)을 더 찾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알쏭달쏭한 통지를 접하니 상봉이 제대로 이루어질 것인가 반신반의하였다. 그런데 적십자사의 회신을 기다리다 용기를 내어 전화를 하니 확정이 되었단다. 준비물과 일정 등에 대하여 유인물이 곧 도착할 것이라고 했다. 이제서야 비로소 이제 가긴 가는구나 하고 정신이 바짝 들기 시작하였다.

평소 가족상황으로 인하여 북한선교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였던 터라 현재 서울대 통일연구원에 계시는 은사님에게 전화를 걸어 준비에 조언을 구하고 선물준비에 나섰다. 그리고 마침내 8월 19일 집결지인 속초로 향하였다. 집결지에 도착하니 환영 현수막이 걸려있고, 보도진들이 포진하고 있고, 적십자사 자원봉사자들이 도열해 있는 것을 보고 머리끝에서 전율이 느껴지며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수속을 밟고, 준비한 선물을 미리 보내고, 교육을 마치는 등 분주하게 순서를 마치고 숙소에 오르니 마음 한 구석에 북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으로 더럭 겁이 솟아오르다 사라진다.

한편으로 금강산 온정리는 내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지역이었다.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던 때에 현대아산 직원들을 위한 교회 설립과 담임목회자로 가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목회 여건상 확답을 못한 상태에서 기회는 스쳐 지나갔지만 늘 마음에 품고 기도하던 지역이었다.

뒤에 동행한 현대아산 직원에게 물으니 마을 쪽에 예배당이 있었지만 관광 중단과 함께 건물까지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쉽지만 마음에 늘 담고 있던 곳이라 호기심도 들었기에 한편 가벼운 마음으로 금강산 행을 준비하며 쉼을 청하였다.

2. 첫째 날

숙소에서 준비된 황태해장국으로 긴장을 풀며 아침식사를 마치고 정해진 차량에 탑승하였다. 10대의 방문단 차량과 적십자사와 통일부 직원들을 태운 버스가 늘어서서 출발하며 이어서 앰블런스 4대와 소방차 그리고 취재차량들이 늘어서니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감흥을 제대로 즐길 여유도 없이 인솔 조장의 주의사항 공지와 핸드폰 수거, 입국신고서 및 세관신고서 작성 등은 모두를 사뭇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동해선 도로 남북출입사무소에 도착하하고 있었다. 모두 하차해 출경심사를 받게 되었다. X-ray 투시기에 짐을 올리고 온몸을 감지기로 체크한 후에 다시 버스에 오늘 수 있었다.

10분여를 달려 군사분계선(MDL)을 살짝 덜컹하고 넘은 후에 역시 10분 정도를 더 달려 북쪽 통행검사소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짐과 신체를 검색한 후에야 버스를 타고 금강산으로 향하였다. 속초에서 승용차로 1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를 4시간 걸려서 도착하였다.

군사분계선에서 금강산 온정리 지역으로 이동하는 여정에 보이는 차창 밖의 풍경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군데군데 북한 병사가 수풀 속에 서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 모습은 무서운 인민군이 아니라 앳된 개구쟁이와 같은 순진한 모습들이었다.

금강산지구에 다가갈수록 여기저기에 농민들의 모습들이 나타나고, 자전거를 타고 어디론가 향하는 주민의 모습도 보이고, 하교하는 학생들의 줄선 모습이 보이는가 하면 심지어는 연애하는 듯한 두 남녀의 뒷걸음질 치는 모습도 보이곤 하였다. 곳곳에 서 있던 북한병사들이나 '영광스러운 조선노동당 만세, 경애하는 최고지도자 김정은 동지 만세'라는 문구만 아니면 참으로 평화로운 우리네 70-80년대의 농촌 풍경과 흡사하였다. 

예정시간 보다 조금 지체한 1시가 약간 넘어서 먼저 대기하고 있던 현대아산 직원들의 환영을 받으며 외금강호텔 앞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숙소인 금강산 호텔로 향하였다. 호텔에 짐을 풀기가 무섭게 우리는 호텔 2층에 마련된 연회장에서 드디어 첫 상봉을 하게 되었다. 각기 주어진 번호를 따라 상봉장에 들어서서 좌석을 찾으니 여기저기서 이미 감격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나는 자제해야지’하는 마음을 머금으며 86번 자리를 찾으니 이미 와 있던 두 사람이 눈에 띄는데 그들도 우리를 알아보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미리 사진을 본 것도 어니고 만난 적도 없는데 알아보게 된 것은 그저 혈육지정(血肉之情)이라고 밖에 달리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자리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서로 누가 뭐랄 사이도 없이 붙들고 울먹였다. 우리를 갈라놓은 70년의 세월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서로를 정식으로 확인하며 인사한 후에 내가 말문을 열었다. “누님! 그리고 동생 그간 잘 살았지요?” 그러자 두 사람에게서 뛰어나오는 섬뜩한 말 “원수님과 당의 배려로 부럼 없이 잘 살고 있다”는 말이 속사포를 쏘듯 튀어 나왔다. 그럴 줄 알고 있었지만 거부감이 드는 것을 다독이며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을 하여 주었다.

한동안 늘어놓던 이야기가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가져온 사진으로 북쪽 가족들에 대한 설명을 듣고 가족들의 안부를 물었다. 특히 막내 고모(최주애)의 근황을 물으니 이번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확인 차 담당자가 남쪽에서 오빠가 살아있고, 찾으려 한다는 소리에 너무 놀란 나머지 심장에 문제가 생겨서 평양병원에 후송되어 입원하였다는 것이다.

안타깝기 그지없다. 마침 남쪽에 있던 아버지의 바로 밑의 여동생이 상봉소식을 들은 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데, 북쪽의 동생도 그렇게 되었으니 말로 다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손끝에 아려온다. 이산가족의 운명이 이런 것이어야 할까.

어느덧 단체상봉 시간이 끝나고 2시간 동안을 쉬었다가 북쪽에서 제공하는 저녁 만찬상봉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첫 단체상봉 때 미처 가져오지 못한 사진첩을 준비하여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사진을 넣은 액자 그리고 가족들의 사진과 가계도(家系圖)를 넣은 사진첩을 꺼내어 밥을 먹는 것도 내려놓고 설명을 하였다.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나와 동생, 이렇게 3대째 목사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작고하신 할아버지 고 최광량 목사는 황해도 장연에서 일찍이 장로로 장립하고 집과 땅을 바쳐 장연 동부장로교회를 건축하셨다. 그러다가 북쪽이 공산화되자 담임목사이신 오순형 목사를 피신시키고 자신은 남아서 교회를 지키셨다.

1.4후퇴 때를 틈타 나의 아버지 최동규 목사와 작은 고모 최선애 권사(통합)를 데리고 남하하셨다. 당시 이미 결혼을 한 고모 최영애 권사(통합)는 시집을 따라 남하하였고, 집에는 할머니와 증조할머니 그리고 어린 두 고모 최주애, 최송애만 남게 되었다. 

이번에 상봉한 고모의 자녀들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남하하신 것을 모르고 살다가 장성한 후에 고모로부터 들었고,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은 더더욱 알지 못했다고 한다. 나는 그분들에게 “기독교란 예수의 정신을 따라 살아가며 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을 돕고 사랑하며 용서하며 화해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러고 설명을 해 주었다.

할아버지는 특히 통일을 위하여 평생 기도하며 북쪽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독신으로 사셨다고 말하니 반색을 했다. 자신들도 할아버지와 외삼촌이 언젠가 돌아올 것이라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고향을 지키며 살고 있다고 했다. 다시금 목구멍으로부터 뜨거운 무엇이 치밀어 오른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식사 시간인데, 자신들은 조금 밖에 먹지 않고 우리에게 좀 더 먹이려 하였다는 점이다. 자신들도 쉽게 먹지 못하는 귀한 음식일 터인데 손님을 배려하는 태도가 엿보였다. 북한 당국에서 교육도 받았겠지만, 어렵사리 찾아온 가족에게 정성을 다하려는 혈육의 정이 눈물겨웠다.

3. 둘째 날

둘째 날 아침 조식은 북쪽에서 준비했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에서 쉬다가 인근의 외금강호텔로 옮겨서 개별상봉을 진행하였다. 이곳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어서 가족들이 둘러 앉아 정을 나눌 수 있는 곳이었다. 이번에는 특별히 시간을 더 갖게 하려고 점심을 도시락으로 배달하여 주었다. 북측의 배려가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속초에서 미리 부친 선물꾸러미를 풀어 소개하는 시간도 있었다. 미리 방에 갖다놓은 짐들을 풀면서 북의 누님과 동생 눈치를 보니 신기해하면서도 짐짓 태연한 척한다. “원수님과 당에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니 세상에 부럼 없다”는 그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려는 모습이었지만 호기심은 누를 수는 없는 것 같다.

화장품 세트, 영양제, 시계, 손수건, 스카프, 양말, 파우치, 참치, 햄, 라면, 사탕, 초콜릿, 젤리, 비누, 치약, 칫솔 등 생활용품을 다양하게 준비하여 우리 쪽 상품을 맛보도록 하였다. 이런 물품들은 북쪽에서 제공했던 간식들과 비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들로 인하여 그들이 다양성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

특히 내가 입으려고 홈쇼핑에서 사두었던 겨울점퍼와 아내가 사두었던 방풍자켓을 동생과 누님에게 주니 좋아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들 모습에 흡족한 마음과 함께 한편으로는 애처로운 마음이 밀려왔다.

점심시간까지 끝나고 오후에 휴식시간을 갖고 다시 3시경에 단체상봉을 하였다. 이때도 간혹 수령과 당에 대한 찬양이 대화 틈을 비집고 들어오기는 했으나 비교적 개인적인 말을 많이 하였다. 아버지는 고향산천에 대한 이야기를 되풀이하여 묻고 동생은 이를 계속 설명하면서도 친절하게 답한다. 외삼촌을 배려하는 마음이 진하게 전해온다. 

누님은 아버지의 건강 문제로 함께 동행한 아내와 음식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그곳에서는 쑥버무리를 ‘쑥솔기’라 한다는 이야기도 듣고, ‘참죽자반’에 대하여 듣기도 하였다. 특히 참죽자반은 아버지도 기억하는 고향 음식으로 황해도 향토음식이다. 참죽새순을 물에 데쳐서 밀가루죽에 고춧가루, 소금, 고추장, 설탕을 넣어 섞은 것을 발라서 말렸다가 기름에 튀겨 먹는 귀한 반찬이란다. 

이와 더불어 북쪽에서 자주 쓰는 말도 몇 개 배웠다. 우리의 올케는 ‘오리미’라고 하는데, 이는 올려 주는 사람이란 뜻으로 며느리로서 부모와 가정을 올려준다는 의미이다. ‘오마니’는 어머니인데, 오만가지 일을 해서 자식을 키우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또 ‘쏠라닥질’은 쥐가 물건을 쏠아놓듯이 이리저리 다니며 말을 늘어놓아 이간질하는 행동이란 뜻이란다. 

이날 우리는 함께 노래도 불렀다. 동생이 노래를 잘 부른다고 하기에 부탁을 했더니 <휘파람>이라는 북한가요를 불렀다. 나도 알고 있는 노래여서 함께 불렀더니 이번에는 아버지가 아는 노래를 부르자고 한다. 아버지는 <고향의 봄>을 선곡하셨다. 함께 부르는데 목이 메었다. 지척인 고향을 가보지 못하는 오늘의 현실이 짐짓 서글퍼진다. 우리가 노래를 부르자 옆자리에서도 노래를 부르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선창하여 함께 부르며 감동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렇게 삶의 이야기를 나누며 노래를 부르다 보니 어느덧 저녁시간이 되어 서로 흩어지게 되었다. 저녁은 우리 방문단만 외금강 호텔 앞 식당에서 우리 측이 준비한 올갱이 해장국을 먹었다. 둘째 날 상봉은 이로써 끝이 났다. 

4. 셋째 날

마지막 날이 밝았다. 이 날은 돌아올 준비부터 하게 되었다. 아침 식사 후에 짐들을 차에 싣고 10시에 전체상봉을 하고 점심을 먹은 후 헤어지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통일이 곧 될 것이니 그때까지 살아서 다시 만나자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였다.

특히 누님은 ‘장은 묵어야 제 맛’이라 하니 이제부터 된장과 고추장을 많이 담가서 통일이 될 때 나누어 주겠다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꼭 건강하게 살아계셔서 온 가족이 함께 만나자는 말을 하며 북측 봉사원들이 날라 주는 점심을 먹고 일어섰다.

북측이 제공하는 상에는 술이 항상 구비되어 있었다. 그중에 포도술이 있었는데 매점에는 구비되어 있지 않아서 사려고 해도 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상에는 매번 올라와서 준비되었으나 우리가 술을 먹지 않는 고로 장식품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마침 북쪽의 동생도 술을 못해서 더욱 우리 상의 술은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였다.

문득 이 포도주를 얻어서 성찬식에 사용하면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동생에게 혹시 구할 수 없느냐고 하였더니 봉사원들에게 남쪽에서 온 형이 필요하다고 말하고는 다른 상의 포도주까지 집어 와서 가방에 넣어 주었다. 그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또한 누님은 막내 동생 준다고 다른 술병을 가방에 담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북한의 가족들끼리 서로 돕는 우애가 끈끈함을 엿볼 수 있었다. 

마침내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우리는 다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분단선이 우리 사이에 다시금 그어지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그들을 상봉장에 남겨두고 차량으로 이동하였다. 차량에서 인원파악을 마친 후에 차의 문이 닫히더니 조금 후에 북쪽의 가족들이 남쪽의 가족들이 탑승한 차량으로 몰려왔다.

연신 손을 흔들며 눈물을 훔쳤다. “잘 가시라고, 또 만나자고, 건강하시라고” 소리를 쳤다. 버스에 창문이 없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들은 손을 흔들며 외치는 모습은 역력했다. 우리도 유리벽으로 가로막힌 차안에서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눈물을 보이고 “또 만나자고, 건강하라고, 잘 있으라고” 외쳤다.

돌아오는 길 역시 평화로웠다. 말없이 눈물을 참고 있는 듯 늘어선 구선봉의 봉우리들을 뒤로 하고, 간혹 보이는 앳된 북한 병사들의 고달픈 경계에 손을 흔들어 주었다. 우리는 다시 북측 통행검사소와 군사분계선 그리고 남측 동해선 도로 남북출입사무소를 거쳐서 5시간 만에 속초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 북쪽에서는 매미가 울고 있었다. 그 매미는 돌아가는 우리를 보고 더욱 크게 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5. 글을 마치며

속초에 오니 CBS 기자가 인터뷰를 요청하였다. 아버지는 소감에 대하여 감격 그 자체임을 말하고 나는 이산가족상봉의 정례화를 말하였다. 5만7천 명 정도의 이산가족들이 생사확인도 못한 상태에서 순번을 기다리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 되었다. 매번 200가족씩 한 해 10번을 한다 해도 2,000명밖에 못 만난다.

30년이 되어야 모두가 만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면 그 전에 이미 이산 1세대는 다 돌아가시고 이산 2세대도 돌아갈 수 있기에 상봉은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종전선언 이전이라도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생사확인과 상시적으로 만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화상상봉과 편지교환, 면회소 설치 등이 긴급히 필요한 이유이다. 이를 통해서 이산가족들이 만나서 서로를 이해하고, 음식을 나누어 먹는 밥상공동체를 회복하며, 언어의 통일을 이루고, 감정의 공감대를 형성하며, 마음의 통일을 이루어 내면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오해와 증오를 씻고, 화합의 장을 넓혀 갈 수 있게 될 것이다.

독일 통일은 하루아침에 장벽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다. 이산가족의 교류로 시작된 전반적인 교류가 전제되어 있었다. 그래서 전우택 연세대정신과 교수는 “사람의 통일”을 주장해 왔다. 사람의 통일을 이룰 수 있는 첫 단추는 당연히 이산가족 상봉이다. 

이제 더 이상 이산의 한을 품고 돌아가시는 가족들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가족들을 지척에 두고도 만날 수 없게 하는 것은 야만적인 폭력이다. 이 시대의 마지막 남은 야만의 장벽을 무너뜨려야 한다. 그래서 이산의 장벽으로 야기된 피맺힌 눈물을 다시는 흘리지 않도록 철의 장벽을 거두어야 한다.

돌아오는 길, 그 야만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남쪽에서도 매미는 힘차게 울고 있었다.

편집부 gcilbo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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