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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우석(于石) 김태영(金泰永) 교수의 서거에 즈음하여.... 다산연구회를 회고한다.

기사승인 2022.01.15  00: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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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열(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숙명여대 명예교수)

1월 11일 노환으로 별세한 경희대 김영태 명예교수. 그는 '실학의 거목'으로 불렸다.

지난 11일 오후 8시에 우석 김태영 교수가 노환으로 돌아갔다. 김 교수는 1971년 경희대 사학과에서 전임으로 봉직한 이래 30여년간 후진을 가르쳤다. 그 동안에 고려대학교에서 『과전법(科田法) 체제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1982) 사학과 학과장과 대학원장 및 인문학연구소 초대 소장을 역임하다가 2003년에 정년퇴임, 지금까지 경희대학교 명예교수로 활동했다.

김 교수는 일찍부터 한국 토지제도사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천착해 왔다. 그는 박사학위 논문을 정리하여 『조선전기 토지제도사 연구』(지식산업사, 1982)로 간행했다. 이어서 실학(實學) 연구를 온축하여 서울대 출판부에서 『실학의 국가개혁론』( 1998)을 간행했고, 조선시대 성리학(性理學)에도 폭넓은 연구를 계속하여 『조선 성리학의 역사상(歷史像)』(경희대 출판부, 2006)도 남겼다.

우석은 이같은 학문적 업적으로 여러 학술상을 받았다. 『조선전기 토지제도사 연구』로 1986년에는 한길사가,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의 학문과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제 1회 『단재상』을 받았고, 1998년에는 봉직하고 있던 경희대학교로부터 제 1회 『미원(美源)학술상』을 받았다.

그는 실학 및 다산 연구에 많은 업적을 남긴 공적으로 2006년에는 다산학술문화재단에서 수여하는 제 7회 『다산학술상』을 받았고, 이어서 2013년에는 이우성 교수가 대표로 있던 재단법인 실시학사(實是學舍)에서 수여하는 제 3회 『벽사(碧史)학술상』도 받았다. 우석의 이러한 수상이 모두 학술상이라는 점에서 그의 학문적 업적을 가름할 수 있다.

필자는 ‘다산연구회(茶山硏究會)’에서 우석과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를 번역하는 일에 같이 참여하여 교제를 나누었다. 다산연구회는 1970년대 중반 한국사와 사회경제사 및 한문학을 전공하는 서울 거주 대학 교수들로 조직되었고, 당시 성균관대학에 재직하던 벽사(碧史) 이우성(李佑成) 교수가 좌장이 되다시피했다. 당시에는 한국사에서도 사회경제사 연구가 활발했고 자본주의 맹아론 등으로 한국 사회의 주체적 근대화의 문제가 논쟁이 되었다.

근대화의 문제를 다루자면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를 충실히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각들이 일어났고, 따라서 조선후기 실학(實學)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었다.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가 주목받게 된 것은 이런 시대환경과 깊은 관련이 있다. 『목민심서』는 일제 강점기에도 국학의 진흥을 위해 정인보 안재홍 등이 교열하여 다산의 문집인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속에 포함, 간행된 적이 있다.

거기에다 다산 서거 150주년이 되는 해가 1986년이어서 늦어도 이 때까지는 다산의 역저(力著)라고 할 『목민심서』라도 번역하여 학계에 소개하자는 논의가 학자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다산연구회에 참여한 학인들은 이우성 교수가 연세가 높은 편이었고 그 다음 강만길 김경태 성대경 이지형 교수를 거치면 대부분 1970년 전후하여 대학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이들이었다. 처음에는 성균관대학에서 모이다가 가끔 경희대학에서도 모였고 1980년쯤해서는 종로 2가 낙원상가 근처의 낙원표구사에서 모였다.

낙원표구사의 이효우(李孝友) 사장은 표구사 2층의 공방(工房) 한쪽에 10여명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여름 방학 같은 때는 며칠간 시골로 가서 합숙하면서 번역에 속도를 내기도 했는데, 이우성 교수의 향리인 밀양에 가서 몇 번 강독을 하기도 했다.

다산연구회의 『목민심서』강독은 1주일에 한 번 정도 진행했다. 매주 모이면 세상돌아가는 이야기를 간단히 나누고 당일 준비한 사람이 원문을 읽고 해석하고 토론하는 순서로 진행, 원고를 완성해 갔다. 강독 때에는 토론이 벌어지기 마련. 이때 우석은 단련된 한문 실력에다 그가 이미 연구한 ‘조선시대 토지제도연구’를 통해 터득한 문헌상 전거와 이론을 가지고 토론에 임해 때로는 토론을 주도하기도 했다.

강독 때에 가장 토론에 적극적이었던 분은 우석을 비롯하여 안병직 정창렬 교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석은 자신의 기존의 연구에다 『목민심서』의 강독과 토론을 통해 뒷날 ‘유형원의 국가개혁안’이나 ‘실학의 국가개혁론’ 등을 더 연구할 수 있었다. 다산연구회는 거의 10년의 『목민심서』강독과 토론을 통해 1985년 첫 완역본 6권을 『역주 목민심서』(창비)를 간행하게 되었다.

번역 모임을 통해 다산연구회 멥버들은 인간적으로도 퍽 친숙하게 되었다. 해마다 정초에는 하례모임을 가졌고 여름 방학 때는 북한산 계곡 등에 가서 단합대회도 가졌다. 부인들도 자연스럽게 모임을 갖게 되었는데 현재 다산연구회는 거의 모이지 않지만 부인들로 조직된 다연회(茶硏會)는 지금도 가끔 모이고들 있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한 쿠테타가 일어났을 때 연구회 멤버 중 6명이 해직되고 남은 이들도 기관에 잡혀가 고초를 겪었는데, 이 때 다산연구회의 재직교수들은 해직교수들을 부조하는 아름다운 모습도 보여주었다.

이렇게 지내던 다산연구회원의 한 분인 우석 김태영 형이 귀천(歸天)했다. 슬픔을 금할 수 없다. 최근 노환으로 고생하신다는 말을 들었으나 찾아가 위로의 말 한마디를 나누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우석이 돌아감으로 다산연구회의 동학들은 몇분 남지 않았다. 벽사 선생이 가신지 5년이 되었고, 그 전후하여 김경태 박찬일 김진균 정윤형 정창렬 성대경 이지형 교수가 차례로 갔고, 이번에 우석이 그 길을 다시 재촉했다.

필자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다산연구회 회원 중에 아직도 강만길 안병직 이동환 임형택 송재소 김시업 이만열이 남아 있다. 작년과 올해는 코로나로 신년하례도 갖지 못했다. 우석 형! 먼저 가신 이들을 만나 다산연구회 회고를 나누시고 우리도 곧 갈 터이니 기다리시기 바란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만열 gcilbo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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