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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작가 문홍연의 # 일상 - 김천시립박물관 나들이

기사승인 2021.09.12  17: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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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김천시립박물관 나들이

"코로나19"란 놈은 참 질기기도 합니다.

어느 곳이나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사람들을 만나기도 어렵고, 마땅하게

찾아갈 만한 곳도 없지요. 다행히 저같은 60대는 2차까지 접종을 마친 상태라서 조금 홀가분하기는 합니다만....

친구들과 직지사 꽃무릇 구경을 갔더니 시기가 조금 빨랐는지 보기 좋게 허탕을 치고, 꿩 대신 닭이라고 혹시나 싶어서 가까운 시립박물관을 들렀더니 관람이 가능하다고 하네요.

그 도시의 진면목을 알려면 박물관을 가보라고 했던가요? 그러고 보니 김천시립박물관이 생긴 지도 제법 되었다는데 제가 너무 무관심했었는지 여지껏 관람을 못했습니다.

사실 ‘코로나 블루(우울증)’시대에 김천시민들이 힐링할 수 있는 공간이 박물관만한 곳도 드물 테지요. 실내라서 더 그렇겠지만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는데 방역은 철저히 하고 있답니다.

여기에다 냉난방까지 완벽하게 되어 있으니 이만한 곳이 또 어디에 있을라구요?

안내 책자를 읽어보니 2017에 착공한 김천시립박물관은 2020년에 준공이 되었군요. 연면적 5,214㎡의 3층 규모이고 전시실, 수장고, 영상실, 체험시설 등을 갖추고 있으며 얼마 전에 경상북도의 엄격한 심사과정을 거쳐서 제1종 전문박물관으로 등록까지 마쳤다고 합니다.

전시실에는 김천지역에서 발굴·발견된 1만여 점의 유물 가운데 600여 점을 전시했고 선사시대부터, 눈부시게 발전한 현재의 김천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역사의 산 교육장이라고 합니다.

        (동행했던 친구가 할아버지의 이름 석 자가 보인다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김천의 역사를 기술한 전시관에서 어느 독립지사의 이름을 발견했습니다.

'송준필' 선생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일제 강점기 때 김천 지역에서 활동한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송준필 선생의 약력(略歷)을 살펴보면....

"송준필(宋浚弼)의 본관은 야성(冶城), 자는 순좌(舜佐), 호는 공산(恭山)이다. 1869년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동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송홍익으로부터 한학의 기초를 익혔고, 17세에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강회에 참석하였다. 이후 30세까지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의 문하에서 배우면서 거창의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칠곡의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 간재(艮齋) 전우(田愚)와도 교류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여 전국의 유생들이 반대 상소 운동을 전개하자 이에 동참하여 안동의 유림들과 참오적소(斬五賊疏)를 정부에 올렸다. 1907년 동래와 대구에서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하여 성주 지역의 향회를 돌면서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일제의 강점 전후 송준필은 고향인 고산동에서 서당을 열어 후학을 양성했는데, 생도들이 늘어나 모두 수용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1914년 가을에는 5칸의 건물을 신축하고 고양서숙이라 이름하였다. 1919년 송준필은 3·1운동을 전후해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과 면우 곽종석,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 등과 유림들을 규합하여 파리평화회의와 조선총독에게 독립을 주장하는 「통고국내문(通告國內文)」을 작성하여 배포하였다. 이 사건으로 그해 3월 4일 체포되어 대구감옥에서 4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7월에 석방되었다.

송준필이 30대의 나이에 참오적소(斬五賊疎)나 국채 보상 운동, 파리 장서 사건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은 개인의 학문이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유학자로서의 도리를 다한 것이라 하겠다. 1933년 김천 부곡동 음지마을에 은거하였고, 1943년 원계정사[현 원계서원]을 열고 후학을 양성하던 중 1943년에 작고하였다."

친구한테서 할아버지의 일화까지 설명을 듣고보니 시립박물관 정문에 심어놓은 절개의 상징 대나무와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널리 알리고 싶은 김천의 자랑스런 인물입니다.

 저 역시 다른 도시를 여행 할때마다 박물관을 들리지만 어느 박물관을 가던지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김천시립박물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시공간과 도표들은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잘되어 있더군요. 하지만 한번 더 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야 하는데... 그런 맘은 안들었습니다. 

시민들과 외부의 관광객을 다시 찾게 만드는 뭔가가 부족한 듯 보였습니다 (대구박물관에서 빌려온 전시물들이 너무 많았고, 플라스틱으로 조잡하게 만든 모조품이 눈에 거슬렸습니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이제는 박물관이 문화공간의 역할을 해야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다양한 계층의 김천시민들의 문화적인 욕구를 충족 시켜주는 역할도 해야 하겠고 성장하는 학생들의 살아 있는 체험학습의 장으로도 활용되어야 겠지요. 또 하나는 향토사학자들한테 김천의 역사를 배우는 장소로도 활용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쉬움이 남는 전시물의 확충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겠습니다. 오랜 역사의 김천시인지라 분명히 많은 유물들이 시민들의 안방 장롱속에서 잠자고 있을거라 생각을 합니다. 적정한 보상금을 주고서라도 김천시에서 구입을 하면 좋겠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김천시립박물관을 관람하고 정문을 나섭니다. 

길 옆의 대나무숲....!
다시봐도 "대나무숲"은 
'신의 한수'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립박물관의 외형을 독특하게 꾸민 관계자들께 큰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잘 만든 대나무숲이 보고 싶어 가까운 시일내에 김천시립박물관을 다시 와야 할 것 같습니다

문홍연 gcilbonews@daum.net

<저작권자 © 김천일보 김천iTV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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