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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원용의 국내여행 : 수원성당-북수동성당

기사승인 2021.07.20  08:4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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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고 했다.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유교와 토속종교가 백성의 삶을 지배했다.

푸른 눈의 외국인 신부가 한반도에 상륙하여 포교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유교사회에서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더군다나 순교하는 것은 웬만한 믿음을 가지고는 어려운 결정이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성당 입구가 보였다.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가끔 성당에 찾아가서 조용히 앉아 있다 오곤 한다. 특히 해외 여행할 때는 성당이 보이면 들어갔다. 성당 안에 있으면 마음이 경건해지고 평온하다.

화성행궁 앞 도로 건너편에 있는 수원성당은 우리나라 성당 중에서 의미 깊고 유명한 곳이다. 천주교 수원 성지며 북수동성당이다. 성당과 옛 소화초등학교 신관과 구관이 이채로웠다.

사탄과 싸우는 하나님의 세력을 나타내는 미카엘 대천사 동상이 특이했다. 제단 아래에는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 일부가 있다. 교회와 달리 성당 내부는 지역마다 또 성당마다 특색이 있다.

공세리성당의 드비즈 신부가 설계하고 1932년에 건립된 수원 최초의 고딕식 성당 터가 있다. 프랑스인 뽈리 신부님이 1934년 일제강점기 때 소화학당을 건립해 문맹 퇴치와 선교를 했다. 그는 한국전쟁 때 피난하지 않고 총살형으로 순교했다. 기다란 수염과 눈이 깊고 평온해 보이는 동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조대왕이 승하하고 조선 후기에 많은 천주교 신자에 대한 박해가 있었다. 천주교인들은 수원화성으로 끌려와 갖은 고문을 받았다.

성당 주변에는 사형을 집행하였던 토포청과 고문을 했던 이아(화청관)와 감옥이 있었다. 피로 얼룩진 고통과 죽음이 가득한 역사의 현장이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교의 믿음은 어떻게 해서 가질 수 있을까? 나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장담할 수 없다.

신부님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만든 뽈리회랑에 들어갔다. 기다란 복도를 따라 나무로 만든 오래된 천장과 기둥, 벽에서 세월의 연륜을 느낄 수 있었다.

석조건물 안에는 여러 개의 전시실이 나뉘어 있었다. 전시실마다 성당의 역사와 순교의 자료가 있었다. 수원 성지의 역사를 볼 수 있었다.

미사 집전에 사용하던 성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랜 시간이 걸려 배로 이동했을 것이다. 천주교인들은 서양으로부터 온 성물들을 신기하고 경건하게 바라보았을 것이다.

여러 가지 고문 도구 가운데 특이한 것은 대들보 형틀이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지고, 피가 솟구치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참혹한 광경이 상상되었다. 사람이 어디까지 잔인할 수 있을까? 하긴 이 시대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2017년에 등록문화재가 되었다.

한국의 기독교는 많은 순교자의 피로 세워졌다. 의외의 장소에서 운명과 신앙, 종교, 믿음에 관해서 생각했다. 세월은 순교의 아픔을 묻었고, 현재의 평화로움이 공존하고 있었다. 

편집부 gcilbonews@daum.net

<저작권자 © 김천일보 김천iTV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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