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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회 장애인의 날에

기사승인 2021.04.20  18:4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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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재(본 신문 발행인, 철학박사)

이명재(본 신문 발행인, Ph. D)

오늘(4월 20일)은 장애인의 날이다. 국가가 기념일로 정한 지 40성상이 지났다. 장애인의 날은 그들을 떠받드는 날이 아니다. 장애에서 오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조금이라도 헤아리며 공감하는 날이다.

장애의 고통은 당사자만이 안다. 비장애인들은 그것을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상상이 현실로 이어져 실천으로 옮겨지는 것은 의외로 어려운 과정이다. 불가능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래도 비장애인이 장애인과 함께 하려는 것은 소중하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예전에 비해 많이 개선되었다. 반세기 전만 해도 가족 중에 장애인이 있으면 쉬쉬하며 감추기에 바빴다. 덮으면 장애가 없어지는 것처럼...

장애인을 단지 불쌍한 존재, 도움받아야만 하는 약자, 따라서 시혜받아야 할 대상자로 봐서는 안 된다.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이웃으로 생각해야 한다. 나와 무관한 사람이 절대 아니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 중 장애인 비율을 10% 정도로 보고 있다. 이 중 사고 질병 등으로 된 후천적 장애인이 90% 이상을 차지한다.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비장애인을 그래서 예비 장애인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이 사회는 함께 어울려서 살아가도록 만들어졌다. 그게 조화로운 사회, 건강한 사회이다. 세상의 흐름이 약육강식(弱肉强食), 우승열패(優勝劣敗)를 강요한다고 해도 그건 동물 세계의 법칙이지 사람의 법칙은 아니다.

사회는 한 단계씩 진보하고 있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도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 이런 사회 인식이 다른 영역의 변화까지 이끌고 있다. 종교계도 예외가 아니다.

가까운 예로 성경 번역을 들 수 있다. 문둥이(순 우리말)가 나병 환자(한자어)로 지금은 한센병(영어) 환자로 표기하고 있다. 외국어로 표기하는 것이 반드시 좋다고 할 순 없지만 순화되어 들리는 효과는 있는 것 같다.

국가도 변화의 발걸음에 보조를 맞추려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장애에 등급이 있었다. 1급에서 6급까지. 장애에 무슨 등급이냐며 반대 운동을 펼쳤다. 지금은 중증 경증 두 가지로 구분해 정책을 집행하고 있다.

이럴 때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이 다음과 같은 말이다. 존재가 인식을 규정한다는... 생활의 패턴이 내외적 삶의 조건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장애인인 내가 공공건물의 장애인 시설들을 눈여겨보고 다닌다.

[제작 이태호, 정연주] 사진합성, 일러스트

계단 외에 경사로가 있는지, 높은 건물에는 승강기가 설치되어 있는지, 장애인 주차공간은 확보되어 있는지... 강당, 무대 등 다중 집합 공간의 단상에 경사로 설치 유무 등을 따져보게 된다.

장애인의 이동권을 위해 위와 같은 장애 시설 설치는 법적 의무조항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강단에 설치하는 경사로는 필수가 아닌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얼마 전 SNS상에 장애인 등 약자 배려는 종교계가 사회를 견인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마지못해 끌려가는 듯한 현실을 지적하는 글을 올렸다.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때 예로 든 것이 강단 경사로 설치 유무였다.

공공시설 강당 등엔 경사로가 설치되어 있거나 설치 중인데 종교 시설엔 그것이 전무하다시피한 것을 지적했다. 그 글을 읽고 가까운 목회자 한 분이 사신을 보내왔다. 전체적 맥락엔 동의하지만 비효율적 측면을 간과해선 안 된다는 거였다.

그분의 지론은 이런 것이었다. 교인 중 극소수의 장애인(그것도 지체장애인!)을 위해 없는 재정을 들여 경사로를 만드는 것, 더욱이 장애인 성도가 강대상 올라갈 일은 거의 없는데, 강대상에 장애인 시설을 만드는 것은 깊은 생각을 요한다.

이런 인식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이것을 확대하면 사회의 공공시설 강당에도 경사로를 설치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장애인은 비장애인에 비해 소수이고 따라서 강단에 올라갈 기회가 많지 않을 테니까.

강자가 더 강해지는 사회, 부자가 더 부자 되고, 지식 소유자가 정보를 독식하고, 육체적으로 건강한 사람만이 활보하는 세상이 바람직한 사회라고 본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다.

그러나 진정 건강하고 바람직한 사회는 장애인이 걱정 덜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아닐까. 장애인을 보는 사회의 눈이 많이 따뜻해졌다. 제도적으로도 보완되고 있다. 여기에 장애인과 손잡고 살 마음을 갖는다면 따스함의 강도는 더 커질 것이다.

이명재 lmj2284@hanmail.net

<저작권자 © 김천일보 김천iTV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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