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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동학혁명의 발자취를 찾아

기사승인 2020.10.30  09:5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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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4일, 김천교육너머 주관으로 어른과 아이 해서 30명은 동학혁명 탐방길에 나섰다.

예전같으면 버스 한 대로 가면서 설명도 하고 내려서 직접 눈으로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을텐데, 코로나19는 그러한 답사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자차로 이동하는 것, 밥을 먹지 않고 헤어지는 것이었다. 처음 해보는 방법이지만 한 번 시도해 보기로 했다.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푸르고, 들판은 노랗게 물들어 있다. 울긋불긋 물든 나뭇잎이 여기 저기 떨어져 가을이 깊어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이 가을을 한껏 즐길 수 있음은 역설적이게도 코로나가 가져다 준 선물이었다. 이렇게 맑은 가을 하늘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던 것이 정말 몇 년 만의 일이던가?

율곡동 주민센터에 모여 체온을 재고 간식거리로 김밥과 물을 받은 후 이동욱 김천교육너머 대표가 짤막한 인사와 안내자들 소개를 했다. 짝을 지어 차에 올라탔다.

처음 탐방지는 구성면 용호리에 있는 '내칙ㆍ내수도문반포기념비'다. 1990년 대한천도교여성회가 내칙ㆍ내수도문 반포 백주년을 맞아 용호리 입구에 세운 기념비다. 작은 폭포가 흐르고 있어 주변 경관도 아름답다.

김천은 그렇게 큰 명문거족이 없어서 양반 세력들이 강하지 않았다. 게다가 교통의 요지로 예로부터 상업이 발달하고 그런 만큼 외부의 소식들이 빨리 전해졌다. 그 덕분에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기 전 이미 김천에는 동학교도들이 널리 퍼져 있었다. 교주인 최제우도 이곳을 다녀간 적이 있고, 2대 교주였던 해월 최시형이 몇 년에 걸쳐 구성과 어모에 숨어살면서 포교 활동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최시형이 동학교도 김창준의 집에 숨어 살며 포교 활동을 하면서 여자가 지녀야 할 덕으로 반포한 것이 곧 내수도문이고, 태교에 대해 쓴 것이 내칙이다.

비문 내용에 대부분 여성인 참가자들이 관심을 보였다. 쌀은 다섯 번 씻고, 먹던 밥과 반찬은 새 반찬과 섞지 말고, 이 빠진 그릇에 밥을 담지 말라는 것이나 침을 멀리 뱉지 말라는 등, 위생 수칙이 구체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인지 동학교도들은 병에 걸린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하니까 담박 감탄사가 쏟아졌다. 코로나 시대 예민해진 사람들의 마음에 와닿았던 것 같다.

조금 떨어진 '천도교복호동수련원' 가는 길 옆으로 맑은 냇물이 흘러가고 있었다. 논에는 가을걷이가 끝나 볏짚을 묶어놓았다. 요즈음은 비닐로 휘감아놓았는데 특이하게 묶어서 세워놓았다.

복호동수련원은 오랜 동안 방치된 듯 다소 쓸쓸하고 퇴락한 모습이지만 거기에서 보면 마을이 산에 감싸여 있는 모습이 내려다보이고 아늑한 것이 정말 숨어살기 좋은 곳처럼 보였다. 동학혁명이 끝날 무렵에 동학교도였던 김구(김창수)가 이곳에 다녀갔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우리는 안에 들어가보지 않았는데 김동기 시의원이 안에 들어가 찍어온 사진을 보니 쓸쓸한 바깥 모습보다는 깔끔하게 잘 갖추어져 있었다.

다음 탐방지는 동학과 다소 거리는 있으나 1974년 12월 10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었으며, 2019년 12월 30일 대한민국 보물 제2047호로 지정된 '방초정'이다. 방초정은 무엇보다 온돌난방이 특징인 정자이다.

정자에 둘러가면서 걸려 있는 한시들은 이름 있는 선비들의 작품이다. 한 30편 정도 된다고 했다. 예전 이곳엔 높은 양반들, 그것도 아주 글 잘하는 선비들만 올라올 수 있었다고 한다. 여자들이나 평민들은 감히 오를 수 없는 곳이라는 이야기와 일제 강점기 남편이 죽자 자진하여 죽은 진씨 열녀문을 전국의 유림들이 돈을 내어 세웠다는 이야기에 여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유교와 동학의 차이를 여기서 볼 수도 있었다.

내려오니 아이들이 무척 즐겁게 뛰어놀았다.

임진왜란 무렵 방초 이정복과 막 혼인한 최씨가 친정에서 며칠 보내고 남편이 먼저 떠난 뒤 뒤따라 시집으로 오는데(신행) 왜적을 만났다. 왜적에게 겁탈당할 위기에 처하자 스스로 목숨을 던진 연못- 원래는 작은 웅덩이였는데 확장한 것이라 한다.- 을 최씨를 기려 최씨담이라 불렀다. 이 연못 물은 농경지에 물을 대고 하수를 정화시키는 기능도 있다고 한다.

 웅덩이에 붙은 우렁이알에 대해 퀴즈를 냈더니 한 어린이가 맞췄다. 아이들은 퀴즈를 맞춰서 샤인머스켓 포도를 상으로 받는 걸 좋아했다. 특히 중학교 1학년이라는 한 남학생은 계속 답을 맞추는 통에 우린 그 아이를 말려야 했다.

연못을 한 바퀴 돌고 다시 나라에서 내려준 최씨 열녀문과 유림들이 진씨를 위해 세운 열녀문 앞에 섰다. 우리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희미한 글자가 새겨진 돌비석이었다. 최씨가 연못에 몸을 던질 때 그를 따르던 여종 석이도 이 연못에 몸을 던졌다. 그를 위한 비를 아마 평민들이 만들었을 듯한데 어디 세우지를 못해 연못에 던져두었는지 1970년 대에 연못 정화를 하다가 발견하여 최씨 열녀문 앞에 세워두었다. 투박한 '충노 석이'라는 돌비석의 글자가 '숙부인 최씨'를 기린 화려한 비석의 글자와 대조되어 조선시대 높은 신분의 벽을 느끼게 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 평등한 세상을 만나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있었던 석이의 처지에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우리가 찾아가는 곳은 '감호정'이다. 감호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여대로의 호이다. 그 공을 인정받아 지례현감이 되었던 분이라고 한다.

바위에 감호정이라는 글자만 희미하게 새겨져 있는데, 집주인인 여씨가문의 종손은 아마도 이 바위위에 정자가 있지 않았을까 추측한다고 했다.

이 감호정(지금은 구성면 상리이지만 당시에는 지례현 기동이었는데)에 농민군들이 집결하여 강을 따라 가며 그 세를 불려 마침내 감천 백사장에 이르니 장관이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감호정이 집결지가 된 이유는 기동 접주 김정문이 여씨 집안의 고지기(고직, 창고·묘·정자 등을 지키는 관리인)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1936년 병자년 대홍수에 마을이 물에 다 잠겨버려 지금 집들이 있는 곳은 예전 터에서 물러나 지어졌다고 한다.(사진은 1932년 감호정에서 활쏘기 대회를 하고 찍은 동아일보 사진을 국궁신문에 실어놓은 것이다.)



우리가 모인 곳은 그 옛날 감호정이 있었으리라 추정하는 곳이다. 이곳에 마을이 있었고, 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홍수가 난 뒤 앞에 물줄기를 돌리고 제방을 쌓은 것이 지금 흐르고 있는 강이다. 여기서 조마까지는 다 동학농민군 창의지며 동학접주도 가장 많이 있었다.
기동(구성면 광명리)접주인 김정문을 비롯, 강주연 : 죽정접주. 조마면 신안리, 강기선(영) : 강평접주. 조마면 강곡리, 배재연(군헌) : 신하접주. 조마면 신안리, 권봉제(학서) : 장암접주. 조마면 장암리 등이다.

바람이 몹시 불어서 여씨 하회택으로 들어갔다. ㄷ자형이라 복호동 수련원처럼 바람이 들이치지 않고 아늑한 곳이었다.

김찬수님이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노래를 틀었다. 잔잔한 노래가 흘러나오는 동안 눈 앞엔 나뭇잎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그 옛날 평민이나 상민들이 동학을 만났을 때 얼마나 가슴 벅찼을까? '사람이 곧 하늘이다'며 양반이든 상놈이든 신분에 관계없이 서로 맞절을 하고 어린이에게도 하늘이 깃들어 있으니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는 교리가 얼마나 그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을까? 동학혁명 후 도피하여 목숨을 살린 손병희가 천도교로 동학을 이어받은 후 3.1운동에 적극 나서고, 방정환이 '어린이날'을 제정한 데에는 이런 흐름이 있었지 않았겠나.

이 집은 감호정 바위가 있던 여대로 의병장 종가집은 아니고 그 방계인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여환옥님의 생가이다. 여환옥님은 상해임시정부 국내위원으로 군자금 8만 여원을 보내기도 한 사람인데, 독립운동을 위해 좌우가 합작하여 만든 단체인 신간회 김천지역 지회장을 지냈고, 해방직후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던 분이다. 종가집에 가서 감호정 바위를 확인하고 탁본을 뜨고 싶었지만, 시간이 부족해서 아쉽게도 자리를 떠야 했다.

마지막 장소인 배다리 인공폭포 주차장에 이르니 바람이 몹시 불었다. 추위에다 배고픔에 좀 지쳤다.
그런데 상상이 되는가. 이곳에 소금배가 올라왔다는 사실이... 그래서 배가 닿는 곳이라 해서 배다리 동네라 불려졌다.

배에서 내린 사람들은 짐을 이고 지고 해서 나무다리를 건너 백사장 시장(웃장)에 내려갔을 것이고, 그들에게 먹을 것 입을 것을 제공할 주막과 여각이 일대에 늘어져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이곳에서 동네 있는 곳까지를 대체로 배다리로 보면 될 것 같다. 기록에는 동학농민군들을 잡아 김천시장에서 처형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이가 오랜 한 어른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강 건너에서 비적들을 처형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한다. 그분 말씀이 더 신빙성이 있을 것 같아 이 근처에서 일부를 처형하고, 일부는 성의고등학교 뒤쪽 까치골에서 처형했으리라고 보지만, 처형 장소는 조금 더 공부해서 확실하게 해야 할 것 같다. 그래야 오늘날 이만큼 민중이 주인 되는 삶을 사는 데 밑돌을 놓으신 그분들의 값진 삶을 추모하고 가까이서 술 한 잔 올려드릴 수 있을 것 같다.

다리 건너 우체국을 지나 김태홍 산부인과에서부터 길은 여각이 있었던 곳으로 짐작된다. 원래 감호동과 용두동 사이 길이 없었는데, 일제가 길을 만들어서 지금과 같은 모양이 되어서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그 중 한 곳을 도소(동학을 포교하던 본부인데 집강소와 동일하게 보아도 무방하다는 동학학회 말씀)로 썼다고 한다. 어디쯤일까? 우리는 대체로 찬물집이나 아니면 부근이 아닐까 추정해 보았다.
 
(주로 동학 지도자들을 처형했던 까치골)

까치골과 집강소터는 설명으로만 하고 우리 탐방은 끝났다.

마무리 평가에서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것이 지적되었다. 점심을 먹고 오후 3시 정도에 마치는 시간을 가져야 여유있게 체험활동을 하지 않을까 해서였다.

'경상도 김천동학농민혁명'(동학학회 지음)에서 채길순님(소설가, 교수)은 김천지역 관광지도에는 동학혁명사가 빠져 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도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에 1년 가까이 낑낑대었다. 우리가 전문연구가도 아니고, 지도를 컴퓨터에 그리고 편집하는 데도 문외한이었기 때문이다. 일러스트를 전공하는 조카와 지리 전공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부족하나마 완성했다.

지도에는 세 부분으로 나누었지만, 실제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답사해도 좋을 것 같다.

아무쪼록 기차를 타고 그냥 지나치는 김천이 아니라, 동학혁명의 발자취를 더듬고 
 

(김천교육너머팀은 개령독립운동가 김단야에 대해 공부하고 그를 찾아 개령답사를 했다.)

개령 농민항쟁과 독립운동가 김단야의 흔적을 찾았으면, 감천의 모래가 얼마나 고운지 모래축제도 하고, 지례(지례는 1920년대 백정들의 신분평등을 주장한 형평사 운동의 중심지였다.)의 돼지고기 맛이 어떤지 맛보고 마음을 가득 채우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이상 사진과 글 / 김천교육너머).

편집부 gcilbo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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