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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두 분의 죽음

기사승인 2020.10.26  16:5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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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충구(감신대 은퇴교수, 기독교사회윤리학)

박충구(감신대 은퇴교수, 기독교사회윤리학)

1.
최근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 분은 이대에서 조직신학자로 평생 가르치신 박순경 박사, 다른 한 분은 삼성을 일구어낸 이건희 회장이다. 한 사람은 분단된 이 땅의 신학자로서, 한 사람은 기업가로 살아왔다. 

2.
박순경 박사는 신학자로서 살아가면서 평생 한반도의 통일에 대한 진지한 이해를 담은 여러 책을 썼다. 민중신학, 토착화 신학자들과는 결이 다르게 민족의 통일과 화해를 늘 염두에 두었던 박 박사님은 제국주의적 침탈의 통로 노릇을 했던 선교사들의 부정적 역할을 날카롭게 비판하던 학자였다. 

남성중심주의 세계인 기독교 안에서 여성 신학자로 살아간 박 교수님은 파쇼적인 남성 신학자들의 관계적 폭력을 몹시 싫어했다. 꽤 유명한 신학자들이 독신으로 살아가는 박 박사님을 빗대 야한 농담을 자기들끼리 주고받으며 낄낄대며 떠드는 모습을 보고 나는 개인적으로 깊이 실망한 적도 있었다. 

박 박사님의 통일에 대한 신학적 사유는 하나님의 정의라는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며, 관계와 혈연적 연대를 나누어온 부당하고 불의한 행위에 대한 고발이라는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통일신학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여러 신학적 저술을 남긴 그녀는 통일이라는 과제는 결국 반통일 세력에 대한 신학적 평가 과정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3.
이건희 삼성 회장은 아버지로부터 부를 물려받아 평생 부를 늘이고, 축적하는 일을 하며 살아 삼성을 우리나라 제1의 재벌기업으로 자리 잡게 만든 인물이다.  그의 아들인 이재용 삼성 부회장 역시 재산을 증식하는 과정에서 부당한 이익을 도모한 것으로 인해 재판을 받고 있다.

기업을 키우기 위해 그가 사용한 수단이 모두 적법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유형의 권력과도 부도덕한 연대를 나누며, 독점적 지원을 받아온 재벌들은 각기 가지고 있는 긍정적 기여의 측면에 못지않게 부정적 측면도 적지 않다. 삼성은 세계적 대기업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기업경영의 비민주적 방식으로 인해  노조 와해 공작과 더불어 산재 노동자들을 외면해온 기업 이미지를 많은 이의 기억 속에 남겼다. 

내가 기억하는 이건희 회장의 마지막 모습은 그가 그의 딸보다도 더 젊은 여성들을 자기 처소로 불러들여 자신의 성적 욕망을 해소한 것으로 의혹을 가지게 하는 모습이었다. 그 이후 그는 수년 동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그의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과 뜬소문이 자자했었다.  그러다가 어제 비로소 그가 사망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4.
분단된 나라에서 민족의 화해와 평화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살아온, 윤리 없는 한 기업인을 향해 신문과 언론은 이구동성 삼성 재벌을 존재가치와 비슷한 평가를 내놓는다. 반면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살아온 한 신학자의 삶에 대한 평가나 사상적 조명에는 한 없이 인색하다. 

"공수래 공수거", 빈손으로 왔다가 다시 빈손으로 떠나는 삶이지만,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그의 삶이 의미 있는 삶이었다고 평가를 내리는 것일까? 거대한 재벌가의 재산에 대한 산술적 수치를 들어 그의 삶을 위대하다고 보아야 하나?  

분단국가에서 분단 상황에서 비롯한 막대한 군수물자를 조달하여 막대한 수익을 올리며 부를 쌓아온 삶과, 분단 국가의 고통과 아픔을 이용하여 돈을 벌기보다는 그 고통의 근원을 치유하고 싶어 했던 한 신학자의 총체적 삶은 일면 비교불가능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삶과 업적에 대한 평가는 관점에 따라 사뭇 다를 수 있을지라도 "존경을 받는 삶과 그렇지 못한 삶"은 분명히 나뉜다. 소유의 많고 적음이 우리의 존경을 좌우하지는 않는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사람들이 옷깃을 여미며 존경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경우는, 그가 그저 그런 삶이 아니라, 남다른 도덕적 신념과 가치를 가지고 산 경우이다. 

 
5.
사람들은 숫자를 따라 크고 적은 것을 비교하고, 큰 것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습성이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대부분의 대형 교회 목사들이 존경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업적이 모자라서가 결코 아니다. 그들이 쌓아놓은 것에 비하여 그들의 정직의 기준과 도덕적 수준이 너무 낮기 때문이다.  

대통령을 하고서도, 대학 총장을 하고서도, 검찰 총장을 하고서도 일반의 존경을  전혀 받지 못하는 사람, 재벌가를 이루었어도 뭇 사람 마음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는 삶을 바라보며 우리는 사실 일종의 허무를 느낀다. 

주어진 생을 살아가다가 언젠가 죽음을 직면해야 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허무를 이기게 하는 것은 돈이나 재산이 아니라, 삶의 의미이며, 그 삶의 의미는 정직이나 진실, 그리고 도덕성 없이 채워지는 경우란 거의 없다.

박충구 gcilbonews@daum.net

<저작권자 © 김천일보 김천iTV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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