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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시평] 편히 쉬세요, 고마웠습니다.

기사승인 2020.07.10  13: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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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재(본 신문 발행인, 철학박사)

고 박원순 서울시장

어제(7월 9일) 일이 있어서 강원도 춘천을 다녀왔다. 돌아오는 고속도로 상에서 조카의 문자를 받았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실종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대명천지에 실종은 무슨... 이렇게 생각했지만 불길함이 꼬리를 물며 똬리를 틀었다. 여기 저기 검색해 보니 미투 이야기가 나오고 유언 비슷한 말을 남겼다는 확인되지 않은 글이 몇 개 올라와 있었다.

장거리 운전을 하고 귀가하니 심신에 피곤함이 몰려왔다. 육체적 피로감보다도 박원순 시장의 실종 사건으로 인한 정신적 중압감이 더 컸던 것 같다. 그의 실종이 죽음으로 연결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구체적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미투 사건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만으로도 그는 견디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도덕적 가치를 늘 추구해온 그였다.

평생을 지조로 살아 온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전형적인 시민운동가로 투명사회를 만드는 데에 그의 헌신을 빼놓을 수 없다. 시민운동을 한 나도 그에게 빚진 것이 없지 않다. 이런 저런 상황이 얽혀 어제 밤은 정신이 혼몽했다. 그런 와중에도 신우회 단톡방에는 박원순이 죽어 돌아오기를 바라기라도 하듯 저급한 가짜 뉴스를 퍼 날라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자정을 지나고 긴급 속보가 떴다. 박원순 시장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사념(思念)들이 교착되었다. 내가 죽음의 당사자라도 되는 양 슬프고 화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에너지가 쑥  빠져 심신을 가누기가 몹시 힘 들었다. 박원순을 단순히 개인적 관계가 아니라 큰일을 감당할 공인으로 기대하는 바가 컸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첫 인상이 중요하다. 인권변호사라는 단어도 그를 통해 알게 되었고, 개인의 영달이 정점을 향해 치닫을 때에 지식인도 시민운동으로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것도 그를 통해 가늠할 수 있었다. 지난 날 시민단체 대표 연석회의 등 공적인 자리에서 박원순을 만나면서 느낄 수 있었던 생각은 소박함이었다. 마치 노무현 대통령이 그것 때문에 좋았던 것처럼...

이런 일도 있었다. 1988년 제13대 총선 때로 기억한다. 역시 인권변호사로 알려져 있는 박용일 선배가 진보 정당 간판을 달고 국회의원 선거에 뛰어들었다. 한겨레민주당 후보로 송파을에 출마한 것이다. 건대전철역 근처에 있는 동부지원 건너편에 선거사무실을 냈다. 변호사 사무실을 나누어서 급조한 총선용 사무실이었다. 조촐한 개소식 행사를 가진 날이다.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개소식에 참석해서 당선을 기원해 주었다. 축하객 중에 박원순 변호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개소식에 쓸 물품을 사러 나가는데 그가 사무실로 오고 있었다. 평상복 차림에 큼직한 난 화분을 들고 있었다. 30 여 년 전이라고 해도, 전화 한 통이면 사무실까지 배달을 해 줄 터인데, 화분을 사서 직접 들고 오다니. 돈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그의 근검절약은 몸에 배어 있었다. 한 푼의 돈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종종 '짜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는 전혀 괘념치 않았다.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있었다. 당시 인기 상승에 있던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와의 대결이었다. 어느 모로 보나 버거운 싸움이었다. 정치 초년생인 그가 승리하리라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때 시민운동을 한 동지들이 박원순 지지로 힘을 모아 주었다. 지금도 인터넷에 ‘박원순을 지지한 김정일 똘마니들’이라는 명단이 돌아다닌다. 안철수와의 단일화를 거쳐 그는 나경원을 누르고 어렵게 당선되었다. 그때의 지지성명이 큰 힘이 되었다며 그는 두고두고 고마워했다. 시민운동 동지들을 잊지 않고 열심히 하겠다고 약속했다.

시장이 되고 나서 그는 정말 시민운동 경험을 시정에 반영하려고 노력했다. 뿐만 아니라 시민운동단체 인사들을 특채해서 그들을 통해 의지를 실천하려 했다. 그는 스스로를 소셜 디자이너라고 했다. 사회를 업그레이드해 살기 좋게 만드는 사람 정도의 의미이다. 시장 집무실부터 그렇게 꾸몄다. 사회적 기업 상품들을 전시했고, 연구 보고서 계획서 등으로 책장을 가득 메웠다. 시장 집무실이 이랬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는 공부하는 시장이었다. 

공부하는 박원순이란 말이 나왔으니 첨언하고 싶은 게 있다. 그는 애서가로도 유명하다. 거기에 더해 여러 권의 책도 저술했다. 그가 쓴 책 중에 <국가보안법 연구>(전 3권), <야만의 시대>를 특별히 꼽고 싶은데, 이것들은 실천적 법률가인 그만이 쓸 수 있는 책이다. 독립문 근방에 영천시장이 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다. 시장 통로 벽에 책을 쌓아놓고 파는 헌 책방이다. 거기에 작은 간판이 보일 듯 말 듯 붙어 있다. '골목서점'이라는 상호. 단골 박원순 변호사가 직접 글을 써서 음각해 선물한 것이다. 주인이 늘 자랑했다.

박원순이 시장이 되고 나서는 공무에 쫓겨 뜸했지만 시민운동을 할 땐 초청하면 기꺼이 달려가서 시민운동의 확장성에 대해 강의를 했다. 2008년 6월 경남 창원에서 한국 YMCA 전국연맹 총회가 있었다.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인 박원순을 강사로 초청했다. 사회적 기업에 대해 강의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조곤조곤하면서도 겸손함이 배어 있는 그의 강의는 참석자들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저며 온다.

박원순은 평생을 명분과 지조로 살아온 사람이다. 물질보다 정신적 영역에 가치를 두고 살아왔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페미니스트이다. 여성들의 권익을 위해서도 변론 등 많은 활동을 해 왔다. 이러한  공으로 한국여성단체연합으로부터 올해의 여성인권상을 받기도 했다. 그런 박 시장이 미투의 가해자로 고소를 당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그의 선택지가 많지 않았을 것임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명재 목사(본 신문 발행인, Ph. D)

한 번 왔다가 가는 게 인생길이라고 하지만 극단적 선택을 한 박 시장의 경우는 우리를 너무 허탈하고 황망하게 만든다.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마음이지 않을까 싶다. 그에게 기대한 것이 많았기 때문에 더 그렇다. 이제 그런 기대를 접어야 한다. 그가 세상을 떴다. 박원순, 수고 많이 했다. 마음의 짐이 무척 무거웠을 것인데, 이승의 일 다 잊고 저승에서 쉼의 시간 갖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다.

발행인 gcilbo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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