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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제주 4․3’, 원한의 역사를 화해의 역사로

기사승인 2020.04.03  21:4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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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열(숙명여대 명예교수, 전 국사편찬위원장)

이만열(숙명여대 명예교수, 전 국사편찬위원장)

오늘(4월 3일) ‘제주 4.3사건’ 72주년을 맞아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하는 추념식이 있었다. ‘제주 4.3사건’으로 당시 인구 30만 중에서 그 10%에 해당하는 3만 여명이 사망하고, 160개 마을 중 100여개 마을을 초토화시켰으며, 가옥 2만(혹은 4만)여동이 소실되었다. 피해자 규모와 관련, 어떤 기록에는 27,719명에서 30,000명이 죽었다고 하고, 40,000에서 65,000명이 사망했다는 기록도 있다. 

‘제주 4.3사건’의 원인과 관련, 당시 경비대 제9연대장이었던 김익렬(중령)은 “제주도에 이주하여온 서북청년단원들이 도민들에게 자행한 빈번한 불법행위가 도민의 감정을 격분시켰고, 그 후 경찰이 서북청년단에 합세함으로써 감정의 대립은 점점 격화되어 급기야 극한의 도민폭동으로 전개된 것”이라 써서, 육지에서 건너온 경찰과 서북청년단이 제주 민중에 대해 안하무인격으로 가한 고문치사사건으로 보았다. 당시 미군정 검찰총장이었던 이인도 미군정의 실정과 관리들의 부패가 이런 현상을 불러왔다고 진단했다. 

1948년 5월 10일,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제주도민은 이에 반대, ‘매국 단선 반대와 조국 통일독립’, 그리고 ‘완전한 민족해방’을 주장했다. 이에 앞서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던 300 여명 규모의 무장대는 제주도내 24개 경찰지서 중 12개 지서와 서북청년회 숙소를 공격했다.

그들은 경찰 등의 탄압에 저항하고 또 통일국가 건립을 위해 5․10 단독선거를 반대하며, 외세에 저항한다고 했다. 미군정은 5․10선거를 강행하고자 1,700명의 경찰과 서북청년단원 500명을 제주로 보냈으나 도리어 입산자만 늘려 무장대 세력만 강화시켰다. 초기의 토벌작전 실패 후 경찰은 ‘초토화작전’을 감행했는데, 이 ‘잔인한’ 토벌이 제주도를 대 폭동으로 몰아넣었다.

사진=제주 4.3사건 : http://blog.daum.net/kdn2801/6032996

경찰이 시행한 ‘초토화작전’으로 대부분의 산간부락 주민들이 산으로 도주하여 ‘폭도’에 가담했고, 무장대는 기하급수로 증가, 결사적으로 경찰에 저항했다. 경찰은 중과부적으로 산에서 쫓겨 내려왔고 제주도 산간부락은 대부분 무장대에 점거되었다. 그러자 무장대를 향한 ‘토벌’의 책임이 경찰에서 제주 9연대로 옮겨졌는데 그 수습책임을 맡은 연대장이 바로 김익렬이었다.

사태를 파악한 김익렬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장대장 김달삼을 만나기로 하고 목숨을 건 담판에 나섰다. 이 때 김달삼이 행한 연설은 김익렬이 그의 회고록에 남겼다. 주장의 정당성과는 관계없이 ‘4.3사건’의 무장대 측 입장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에 여기에 조금 인용한다.

그는 앉은 채 연설했다. 그는 “우리나라가 민족자주독립을 해야 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일제하의 민족반역자인 경찰과 일제의 고관을 지낸 자들이 자기들의 죄상이 드러날까 두려워 미국 제국주의의 주구가 되어 해방된 조국의 제주도에서도 일제시대의 몇 배 되는 압정을 가하고 있으며 특히 경찰은 무고한 도민의 재산을 약탈하고 살인 강간 고문치사 등을 일삼고 있다”고 적었다.

그는 또 폭동 전에 있었던 사건들을 일일이 열거하였다. “만주와 이북에서 일제시대에 악질경찰이나 민족반역자 노릇을 하던 놈들이 월남하여 반공애국자 노릇을 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서북청년단을 조직하여 수 백 명이 제주도에 와서 경찰과 합세하여 도민의 재산약탈을 자행한다”고 성토했다.

그래서 “선량한 도민들은 견디다 못해 친일파와 일제시대의 악질 경찰들을 제주도에서 몰아내기 위하여 무장의거를 일으켰다”고 주장하고, “미군정은 이 의거를 수습하기 위하여서는 제주도내에 있는 일제경찰과 민족반역자 관리들을 축출하고 제주도민으로 된 경찰과 관리를 채용하여 제주도민을 위한 행정과 치안을 하여 달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매일반이니 최후의 1인까지 사투하여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결의를 표한다. 김익렬은 김달삼의 연설을 두고 “연설 내용은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언급이나 표현은 거의 없고 제주도에서 민족반역자와 일제경찰 서북청년단을 축출하고 제주도민으로 구성된 선량한 관리와 경찰관으로 행정을 하여주면 순종하겠다는 것이었다.”고 요약했다.

사진=노컷뉴스

지금 봐도 김달삼의 이 증언은 그가 사회‧공산주의자인지, 민족주의자인지 혼동하게 만든다. 이 담판으로 무장대가 산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찰과 미군정은 이들을 공격함으로 담판약속을 뒤집어 버렸고 그 뒤 7년 여 동안 ‘4.3 사건’은 미군정에 예속되었다.

회고록을 남긴 김익렬은 이 대목에서 “나는 경찰의 최고책임자인 조병옥 씨와 토벌사령관 김정호 씨가 제주도에서 동족에게 자행한 초토화작전의 만행을 민족적 양심에서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김익렬은 자신이 회고록을 남기는 것은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통해 “이 국토에 다시는 이런 천인공노할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고 후손들에게 유언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역사의 심판’이라는 용어까지 써 가면서 기록을 남겼을까

‘4․3사건’은 해방 공간에서 친일파 청산 및 민족의 완전자주통일을 소망했던 제주도민들을 희생양으로 만든 일종의 집단학살이다. 또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군이 일제시대의 경찰‧관리들을 그대로 재 등용한 결과이기도 했다. ‘제주 4.3 사건’은 우리 민족사의 여러 운동과 혁명의 전통을 이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그 뿐 아니라 집단학살 및 거기에 수반되는 성폭력 등의 관점에서도 특이하게 다뤄지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엄청난 고난을 겪은 제주를 향해 국가와 국민들은 그 맺힌 한을 풀어주어야 한다. 또 쉽지는 않겠지만, 제주도민도 70여 년 동안 맺힌 갈등과 원한을 넘어 용서와 화해의 메신저 역할을 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한다.

이만열 gcilbo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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