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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서의 군학’(群學), 그리고 봉준호

기사승인 2020.02.12  08: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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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이표(철학박사, 사상문화학)

홍이표 박사(사상문화학, Ph. D)

봉준호 감독의 이야기로 뜨겁다. 조용히 지나갈까 하다가 나도 직업병을 못 이긴 채 한 마디 남겨 본다. 

한 달 전 쯤, 미국의 한 기자가 영화에서 사회 문제를 다루는 것이 사회학을 전공한 것과 관계가 있느냐고 물었다. 봉 감독은 물론 '사회학'을 전공했지만 전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공부를 했다면서, 그래도 사회학 공부의 영향이 영화에 부지불식간에 스며들었는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영화광이었던 중고 시절의 봉준호는 이장호나 배창호 감독 등을 보면서, 반드시 연극영화학과에 가야만 하는 게 아님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인문학을 먼저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했고, 그렇게 선택한 전공이 ‘사회학’이었다. 그런데 지금 관점에서 보면 “사회학이 인문학인가?”라며 질문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봉 감독이 들어간 사회학과는 다른 대학들과 달리 ‘문과대학’에 속해 있었다는 점에서 약간의 의문이 풀릴지 모르겠다. 원래 ‘사회학’이란 명칭은 낯선 근대의 언어였다. 이인직, 장지연 등이 청국에서 Sociology를 번역한 ‘군학’(群學)이란 말을 처음 소개하긴 했지만 그 학문의 내용조차 몰랐다. 이후 학교 공간에서 Sociology 강의가 ‘사회학’이란 이름으로 처음 실시된 것은, 191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文科)에서 개신교 선교사 H. H. 언더우드(원한경)에 의해서였다. 

르네상스 계몽주의와 인본주의는 18세기의 영국 산업혁명과 프랑스의 시민혁명으로 이어졌고, 봉 감독이 인용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격언 “The most personal is the most creative”처럼 ‘개인(個人)’의 발견과 각성이 세계사적으로 일어났다. 이는 동시에 수천 년 지속된 중세-근세로 이어진 서구 전통 사회를 흔드는 불안정 요인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사회를 지배하고 장악하던 ‘기독교’ 세력은 타격을 입었다. 철학, 자연과학, 문헌학, 심리학 등 그 동안 ‘신학’(神學)의 통제 하에 놓여 있던 제반 학문은 일제히 ‘탈 신학, 탈 기독교’의 기치를 내 걸고 독립해 나간다. 신의 세계가 아닌, 인간 군집(群集)의 세속 세계를 체계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사회학’(Sociology)이 탄생한 것이다. 이 학문에 ‘신’(神)이 끼어 들 여지는 없어졌다. 그게 바로 ‘사회학’이었다.

 그런데 한국의 초대 선교사 원두우(H. G. Underwood)의 외아들 원한경(H. H. Underwood)는 뉴욕대학의 실용적 첨단 학문을 수학하고 돌아온 직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한국 최초로 사회학과 심리학을 가르쳤다. 먼저 세워진 평양의 숭실학교나 각 교파의 신학교에서는 생각지도 않았던 선구적 시도였다. 이는 미션 스쿨에서의 하나의 실험이자 도전이었으며 관립 학교에서의 ‘사회학’ 연구는 해방 이후에나 본격 시도된다. 원한경은 1942년에 조선총독부가 그를 추방할 때까지도 기독교 신학과 사회학을 연결시키며 ‘종교’와 ‘인문학’의 조화를 모색하는 강의의 실시했다. 

“문과와 상과의 4학년생들은 칼 박사의 지도하에 ‘종교철학’을 이수한다. 이는 삶의 실제적인 철학으로서의 기독교를 응용해가는 연구이다. 나(원한경)는 볼머(Volmer)의 ‘신약사회학’(New Testament Sociology)을 인용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Heaven)에 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사상에 대한 것이다. 이는 정치적 힘을 위한 조직이나 생태적, 물질적 복지를 위한 조직이 아니다. 또한 개인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 이기적으로 찾는 하늘 나라의 사닥다리도 아니다. 이 나라는 공헌과 교육적 평가 뿐 아니라, 믿음에 의해 도달 가능한 곳이다. 산상수훈에서 예수가 말씀하셨 듯, 그 나라의 헌법은 기본적 율법과 규칙, 그리고 매일 일어나는 오늘 날의 사회 문제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적용할 지에 대한 것이다.”(H. H. Underwood, “The word of God” Korea Mission Field, 제37권 제9호, 1941년 9월호, 138.)

기독교의 종교적 가치와 함께 최신 인문학의 관점을 조화시켜 보려 한 원한경 박사의 시도는 연희전문학교 문과(文科)의 특징이 되었고, 이후에도 사회학과 심리학 연구가 문과 안에서 영위되는 학풍의 초석이 되었다. 영화 ‘기생충’의 마지막 장면에 개들이 근세 몸 주변의 바베큐 고기를 뜯어 먹는 장면은, 누가복음서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 몸에 난 종기를 핥고 있는 개들에게서 따온 연출이라 한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자유로운 학풍의 개신교 학교에 다녔던 봉 감독의 종교적 감수성이 영화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는 건 아닐까?  

“예전에 부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그 집 대문간에는 사람들이 들어다 놓은 라자로라는 거지가 종기 투성이의 몸으로 앉아 그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고 했다. 더구나 개들까지 몰려와서 그의 종기를 핥았다.”(눅16:19-21, 공동번역성서)

또 한 가지 주목하게 되는 것은, 한 동안 연전 문과의 사회학 강의를 『조선사회경제사』(朝鮮社會經濟史)를 집필한 백남운(白南雲) 선생이 맡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한국의 고대중세 역사를 ‘경제사회사’적 관점에서 풀어낸 진보적 역사학자였다(결국 김구, 김규식과 담판지으러 북에 갔다가 남아 북한의 초대 문교상이 됨).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서 이런 학자를 품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다.

그러한 사회학 전통이 깃든 곳에서 사회, 계급, 경제의 문제를 인문학적 감수성을 유지해 가며 공부했다는 것은 민주노동당 창당 초기부터 당원으로 활동했던 봉 감독의 이력, 그리고 사회의 계급, 소외 계층, 나아가 빈부 격차 문제를 지속적으로 관심한 그의 영화와 무관하기만 한 것일까? 백남운이 벽돌 한 장을 놓은 연희전문 사회학은 기생충과 어쩌면 먼 세월을 건너 뛰어 연결돼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으로 감독상 수상한 봉준호 감독/로이터연합뉴스

봉 감독이 공부한 대학의 사회학과는 심리학과과 함께 2004년경까지도 사회과학대학이 아닌 문과대학에 속해 있었다. 이제는 주류 학계의 논리에 편승해 모두 사회과학 분야로 소속을 옮겨 버렸지만, 인문학에 기반 한 사회학 연구의 학풍이란 것은 90년대에도 생경한 일이었다. 

친한 고교시절 친구가 다른 대학의 ‘사회학과’를 지망하자, 나는 대학생활도 함께 하고 싶어 연희전문 후신의 ‘사회학과’를 적극 추천한 적이 있다. 그 친구는 하필 ‘문과대학’에 있는 게 꺼림직 하다고 처음에 반응했지만, 결국 내 꼬임에 넘어가 봉준호 감독의 학과 후배가 되었다. 그 친구는 문과대학 안의 사회학 분위기에 크게 만족했고, 특히 인간미 넘치는 학과 선후배 동기들과의 관계를 만날 때마다 자랑하며 뿌듯해 했다. 하루는 문과대학이 발행하는 『문우』誌를 들고 와서는 윤동주와 송몽규가 만들던 바로 그 책이라고 했다. 

봉준호의 감각에는 이러한 정체성이 일부 포함돼 있을지 모른다. 최근 한 인터뷰를 보면, 봉 감독은 전공 커리큘럼에도 없는 ‘영화사회학’(film sociology)이라는 제목의 졸업 논문을 제출했는데 교수들이 재밌게 읽고 통과시켜 주었다고 한다. 주류 사회학에서는 주변적인 주제를 다룬 학부생에게 너그럽던 인문학적 유연성을 봉 감독은 영화 현장에서도 확장해 왔을지 모른다.

한 분야나 주제, 장르에 구속되지 않은 봉 감독의 독특한 시야도, 차갑고 딱딱한 계량적 학문으로서의 사회학(社會學)이 아니라, ‘사람들’ 속에서 그 세계를 관찰하는 인문학으로서의 ‘군학’(群學)을 영화 작품에까지 구현해 낸 것이 아닐까. 그의 영화에 나오는 ‘인군’(人群)은 선악의 구별도 모호하며 욕망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게 묘사된다. 신 앞에서 귀족과 천민, 부자와 빈자, 남성과 여성, 다중(多衆)과 소수자로 선긋기를 해내는 인간 사회의 실체를 도려 파내듯 그려 내는 힘....

 작금의 거장 감독들을 보아도, 하길종은 불문학을, 이창동은 국문학을, 박찬욱과 허진호는 철학을, 강우석은 영문학을, 그리고 이장호와 이준익은 순수미술을 학부 때 공부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봉 감독과 함께 오스카 감독상 후보였던 마틴 스콜세지도 원한경 박사가 공부한 뉴욕대학에서 영문학을, 봉 감독이 존경한 알프레드 히치콕도 문학에 심취했었다.

봉 감독에게 큰 영향을 미친 구로사와 기요시(黒沢清) 감독도 윤동주가 공부한 릿쿄대학(立敎大學)의 사회학과 출신이다. 무리한 연결일지는 몰라도, 청년 시절의 백지장에 순수한 인문학도, 예술학도로서 창작의 스케치를 해나갔던 이들이 자신만의 색깔을 지닌 작품을 들고 나타나는 두드러진 현상은 우연이기만 할까? 

인문학이 경시받는 이 시대에 봉 감독의 역사적 업적은 ‘인문학’의 가치를 다시 묻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그것은 결국 ‘사람’에 대한 물음...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의 문제이다. ‘사회’도 ‘영화’도 결국은 사람이 만들어 가는 것이고, 사람이 나오는 것이니 말이다.

더 나아가 ‘사람’을 제대로 응시하지 못 하는 ‘사람’의 눈에, 동물과 식물, 강과 바다, 산과 하늘이 들어올 리 만무하다.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을 ‘매춘부’라 능욕한 류석춘 같은 자가 연전 사회학과에 선생 행세를 하는 참담한 현실이기에, 봉준호라는 창작자가 던진 돌 하나의 울림은 더욱 큰 것인 지도 모른다.

홍이표 gcilbo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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