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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익 칼럼] 간디냐 조지 오웰이냐

기사승인 2019.11.17  14: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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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성익(환경과생명연구소 소장)

장성익 소장(환경과생명연구소)

간디에 얽힌 다양한 일화 중에 사탕이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다.

인도의 어느 마을에 사탕을 너무 좋아해서 밥 대신 사탕을 먹을 정도인 아이가 있었다고 한다.
엄마는 아이에게 사탕이 몸에 해롭다고 여러 번 얘기했으나 아이는 말을 듣기는커녕 이렇게 대들었다.

“간디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모를까, 엄마 말은 못 믿겠어.”

이 엄마는 고민 끝에 직접 간디를 찾아갔다. 
그러고선 간디에게 아이를 타일러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하지만 간디는 보름 뒤에 다시 아이와 함께 오라고 했다.

보름이 지난 뒤 다시 찾아가자 간디는 아이에게 “사탕은 몸에 해로우니 먹지 말라”고 얘기했고, 아이는 그 이후로 사탕을 입에 대지 않았다. 
엄마는 왜 보름 후에 찾아오라고 했는지 궁금해서 그 이유를 간디에게 물었다.

그러자 간디는 이렇게 대답했다.

“실은 내가 사탕을 항상 가지고 다닐 정도로 좋아합니다. 그 상태에서는 차마 아이에게 사탕을 먹지 말라는 얘기를 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먼저 사탕을 끊은 뒤에 얘기하려니 보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간디의 도덕적 엄격주의를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한데, 조지 오웰은 이런 식의 간디를 마냥 좋아하지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간디에 대한 소견>이라는 에세이에서 이렇게 썼다.

“인간됨의 본질은 완벽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고, 때로는 신의를 위해 ‘흔쾌히’ 죄를 저지르는 것이며, 정다운 육체관계를 불가능하게 만들 정도로 금욕주의를 강요하지 않는 것이고, 결국엔 생에 패배하여 부서질 각오가 되어 있는 것이다.”

어느 쪽이 옳을까?
쉽지 않은 문제다.
물론 이분법적인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어쩌면, 이른바 ‘기우뚱한 균형’을 이루는 것, 곧 끊임없이 변화하는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 속에서 양자의 동적인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 모범답안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조지 오웰 쪽으로 기운다.
완벽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 인간됨의 본질이라는 그의 견해에 나는 동의한다.

장성익 gcilbonews@daum.net

<저작권자 © 김천일보 김천iTV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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