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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욱 박사의 인문학 산책(32) :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On Liberty)-자유에는 의무와 책임이 따른다.

기사승인 2019.08.06  14:2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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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적인 지성인

우리는 인생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지만 정작 자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진정한 자유란 무엇일까? 그리고 그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우리가 ‘자유’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존 스튜어트 밀이다. 그만큼 우리의 사고에는 그가 있다는 반증이다. 또한 그의 이름이 회상되는 단어는 ‘공리주의’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영국의 경제학자이자 철학자, 사회과학자라고 소개되고 있다. 더 나아가 앞의 셋을 모두 포괄하는 의미에서 사상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경제학이나 철학만이 아니라 정치학, 종교학, 여성학 등 다양한 분야에 정통했기 때문이다. 또한, 밀이 어릴 때 아버지인 제임스 밀(1773~1836)로부터 받은 교육은 영재 교육의 모범으로 알려져 있다.

밀의 아버지인 제임스 밀은 경제학자이자 철학자로서, 벤담의 ‘백지설(theory of the tabula rasa)’의 영향을 받아 아들인 밀의 교육을 이끌었다. 제임스 밀은 자연과학과 고전 중심으로 교육했고, 밀은 논리학과 경제학, 역사학, 철학, 자연과학을 읽음으로써 사물과 인생의 목표에 대한 통일된 관념을 형성할 수 있었다.

보통 천재 교육이 사회교육이나 실천 교육이 모자란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이런 문제를 간파한 제임스 밀은 주입식 암기가 아닌 밀이 스스로 책을 읽으며 요약과 비판을 하게 했고, 아버지인 자신과 질의응답을 통해 이해력을 더욱 깊이 하는 방식으로 교육을 이끌었다. 이러한 교육은 개성교육이라는 점에서 진취적이었다.

영국 공리주의를 대표하는 벤담은 밀의 아버지 제임스와도 친해서 밀이 자연스럽게 공리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밀은 1821년 프랑스에 돌아온 직후, 본격적으로 공리주의자와 토론을 거쳐 자신만의 ‘공리주의’에 대한 사상을 확립한다. 밀은 유용성이 최대 행복이라고 보았다. 즉 인간의 행동은 행복을 증진하는 유용성 정도에 따라서 옳다는 것이다. 가령 사형은 그것이 사회적으로 유용한가, 참된 억제력이 있는가에 따라 판단되어야지 그 자체를 두고 옳고 그르다고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도 자연권에 대한 신념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좋은 국가를 갖게 하는 유일하게 확실한 방법이라는 이유에서 옹호했다.

밀은 열여섯 살이던 1822년부터 신문과 잡지에 투고하기 시작했다. 열일곱 살에 쓴 글에서 표현의 자유를 논한 데서 36년 뒤인 쉰 세 살에 쓰는 『자유론』의 씨앗을 볼 수 있다. 밀은 열일곱 살에 동인도회사에 취직해 동인도회사가 폐지된 1858년까지 평생 근무한다. 밀은 자신이 평생 근무한 동인도회사의 인도 식민 지배를 정당화했을 뿐 아니라 영국의 제국주의 지배도 정당화한다. 이러한 점은 시대를 앞서간 천재이자 사상가였던 밀도, 당대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을 보여준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은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저작으로 평가받는다. 이 책은 1859년에 출간된 이래 1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자유에 관한 논의에서 가장 강력한 한 축을 이룬다. 『자유론』은 막연한 찬양의 대상에 불과했던 자유의 개념을 철학적 원리로써 자세히 분석하고 구체화했다. 그런 면에서 한 자유주의 사상의 고전이라 할 수 있다. 『자유론』은 토머스 칼라일, 매튜 아널드, 제임스 스티븐, 찰스 킹즐리 등 당대의 수많은 저명인사가 각자의 평론을 남길 만큼 혁명적인 저작이었다.

『자유론』은 자유의 중요성과 그 한계를 논한다. 개인, 사상, 언론, 정부, 사회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자유가 차지하는 비중과 그 가치 및 중요성 그리고 보존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밀은 모든 개인의 자유 보장으로서 꿈꾸어진 민주주의가 결과적으로는 다수자의 전제를 가져오고 이에 따라 자유는 압박되고 인간성의 위기시대가 도래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인류가 나아가야 할 길을 개인의 자아 완성과 자유의 신장에 있다고 보고, 공리주의의 원칙에 충실하면서도 개인의 개별성을 보존하는 길을 제시한다.

밀은 민주주의가 유일하게 옳은 정치 형태라고 믿으면서도 동시에 잠재적으로 가장 억압적 정치 형태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권력의 집중, 사회의 획일화, 감시 사회화 속에서 인간이 자동인형으로 변해 자유의 살해자로 등장하는 것을 우려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밀은 민주주의를 더욱 발전시키고, 저항하는 독립된 개인을 교육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밀의 주장에 대한 한계나 인간을 과도하게 합리적으로 보았다는 비판이 있을 수도 있지만, 도리어 편견, 열등, 집단적 하향화에 억눌려 차별받은 사람들에 주목하고, 그들이 가져야 할 가장 본질적 권리가 박탈되었다고 항의한 『자유론』의 주장에 다시 한번 주목해야 한다.

『자유론』 - 다수의 횡포(tyranny of the majority)로부터 자유

 『자유론』은 “인간이 풍요롭게 그리고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하는 것이야말로 절대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가장 중요하다”는 흄 볼트의 말로 시작한다.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의지보다는 시민이 갖추어야 할 자유에 대한 생각을 기반으로 저술했다. 자유란 무엇인가? 자신의 자유과 타인의 자유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모든 인간의 풍요를 기원하는 그의 생각이 반영하고 있다.

이 책은 제5부로 되어있다. 제1부는 서설, 제2부는 사상과 언론의 자유, 제3부는 행복의 한 요소로서의 개성, 제4부는 개인에 대한 사회적 권위의 한계, 제5부는 원리의 적용과 존 스튜어트 밀 연보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주제는 ‘의지의 자유’가 아니라 시민적, 또는 사회적 자유이다. 『자유론』이 전제하는 자유의 원칙은 첫째, 개인은 그의 행위가 그 자신을 제외한 어떤 사람의 이익과도 관련되지 않는 한 행위에 대해 사회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둘째, 하지만 타인의 이익에 해를 끼치는 행위에 대해 개인은 책임이 있으며, 필요하다면 사회적 또는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행위는 이 두 가지 대원칙을 기준으로 개인적 행위 또는 사회적 행위로 분류되어, 허용되거나 제재될 수 있다. 그러나 밀은 원칙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철저히 옹호한다.

밀은 법의 오남용 등 공권력에 의한 것뿐만 아니라 관습을 포함하여 이러한 여론을 이용한 영혼의 통제를 다수의 횡포(tyranny of the majority)로 보았다. 다수의 횡포는 시민의 사회적 자유를 침해하면서도 인간 소외 문제와 같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일으킨다고 본 것이다. 밀은 다수에 의해서 소수의 의견이 무시되거나 그들이 탄압받음으로 인해 사회 전체가 보편 · 일반화되는 현상을 경계하고, 개별성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각 개인은 타인의 행동에 대해서 간섭하는 등 그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행위가 허용되는 경우는 오직 자기 보호를 위해서 그것이 불가피할 때에만 해당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해악의 원리’이며 이를 통해 밀이 개인 자유의 침해와 그로 인한 각 개인의 개별성 침해를 얼마나 경계 시 하였는지 알 수 있다.

밀은 타인에게 더 좋은 결과와 더 큰 행복을 안겨주기 위한다는 명목으로나, 아니면 다른 사람이 볼 때 더 현명하고 옳은 길로 그를 인도하기 위해서이든, 당사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그에게 어떤 일을 시키거나 그가 행하려는 어떤 행동을 금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공리주의자인 그의 결과주의적 면모와 자칫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사실 그의 『자유론』은 그 행위 자체보다도 타인의 자유를 침해했는가의 결과 여부만을 살피기 때문에 철저한 결과주의라고 할 수 있다.

밀에 따르면 자유의 기본 영역은 크게 내면의 자유, 해동의 자유, 근본의 자유, 이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로 내면의 자유는 내면적 의식의 영역과 관련된 자유로서 넓은 의미에서의 양심의 자유, 생각과 감정의 자유, 절대적 의견과 주장의 자유 등이 해당한다. 둘째로 행동의 자유는 각각의 개성에 따라서 살아갈 자유를 의미하고, 마지막 결사의 자유란 해악의 원리에 따른 경우나 강제, 속임수에 의한 경우가 아니라면 모든 개인은 어떤 목적의 모임이든지 결성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밀이 주장한 이 세 가지의 자유가 현대 사회에서도 잘 보장되고 있는지는 우리가 꼼꼼하게 반성해보아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내면의 자유는 타인에 의해서 쉽게 강요되기 마련이고, 행동의 자유는 주변의 시선과 관습에 의해서 위축되며 한정된다. 또한, 대다수 노동자가 노동조합 등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집단에 가입이 되어있지 않거나 그 집단마저도 기업의 횡포로 인하여 노동자들의 권리와 이익 보호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런 점에서 소수의 위치에 서 있는 노동자들의 결사 자유는 특히 사회적 문제까지 일으킬 정도로 다수에 의해서 심각하게 침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제시된 자유들을 아우르면서도 그에 나아갈 수 있게 해 주는 근본적인 자유는 생각과 토론의 자유일 것이다. 인간 정신의 특징 중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바로 토론과 경험 등에 근거하여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 스스로에게도 적용되지만 다른 사람에게까지도 적용된다. 잘못된 의견이 왜 잘못되었는지 그 이유까지 설명해줌으로써 다양한 생각과 토론이 오갈 수 있게끔 해준다는 측면에서 그릇된 의견도 옳은 의견만큼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류 의견과는 다른 결론을 도출하는 탐구 활동이 금지된다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은 소수 의견 추종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이외의 다수들이 된다.

우리가 흔히 ‘모두가 Yes를 외칠 때, 혼자 No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을 높이 사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다. 밀은 전체 인류 중 단 한 사람이 그들과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해서 그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은 곧 다수의 횡포이자 부당한 억압이라고 주장한다. 생각의 억압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이것이 당장 현세대에만 영향을 주는 데에 그치지 않고 미래 세대가 가질 수 있는 자유롭고 다양한 생각을 앗아가는 악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가장 인상 깊으면서도 공감되었던 내용은 사람들의 암묵적인 습관에 관한 밀의 주장이었다. 대부분 사람은 자기 생각이 자신이 추종하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주변 사람들의 생각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면 그 생각에 절대적으로 집착하고, 그 집단에 대한 믿음으로 그에 더욱 의지하게 된다. 이 집단은 특정 정당, 교회, 계급 계층 등이 될 수 있다. 하이데거 역시 다수의 사람 속에 파묻혀서 그들에 동화됨으로써 안정감을 찾아가는 현대인을 본래 아닌 실존이라며 비판하였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우리는 우리가 가진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당연하게도 자기 생각이 틀렸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고 그들의 주류 의견에 동의하려는 습관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그 누구의 의견도 절대적으로 참이라고 결정 내릴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누구라도 판단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다수가 그들의 의견을 소수의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으려는 것도 중요하지만, 개인 자신도 과연 다수의 의견이 절대적인 것인지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자유론』에서 가장 중시하는 개념은 개별성이다. 밀은 개별성이야말로 행복한 삶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라고 말한다. 기존에 관습에 반대되는 것이라는 이유로 다양한 개인의 개별성이 무시될 수는 없다. 이 개인의 개별성이 타인들에게까지 직접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다면 그 또한 제한 없이 허용될 수는 없겠으나, 자신에게만 관계되는 일이라면 그것이 옳든 옳지 않든 함부로 남이 간섭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밀은 욕망과 충동을 긍정한다. 물론 이것이 균형 잡히지 못하여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자질을 키우지 못한다고 해도 이것은 개인 양심의 문제라면서 욕망과 충동의 개별성 역시 인정한다. 그러나 사회는 그 구성원들을 암묵적으로 또는 명시적으로 똑같게 만든다. 이 일반화의 수단과 원인에는 정치적 변화, 교육, 교통과 통신 수단의 발전, 상업과 제조업의 발달, 여론 등이 있다. 하지만 밀은 교육에 관해서 사회는 미성년자들이 합리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계획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책임을 지며 그로써 그들에게 절대적 권한을 지닌다고 한다는 점에서 특정 대상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일반화는 이루어질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현대 사회에서는 밀이 말하는 정치적 변화, 교통과 통신 수단의 발전, 산업 구조의 변화 등이 이미 이루어져 굳어진 단계이다. 그렇기에 당시 사회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일반화를 끌어내는 요인들이 될 수 있었겠지만, 현재 이 의견이 타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약간의 수정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마지막 요인으로 지적된 여론의 경우는 앞서 언급한 다수의 타인에 휘둘리는 현대인의 모습을 근거로 하여 충분히 현대 사회에서도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의견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개별성을 강조하는 밀은 오로지 개인 자신과 관계된 일에 대해서는 사회가 그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한계를 가진다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정말로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관련된 일이 있을 수 있는지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밀이 이런 식의 주장을 펼친다고 해서 철저한 개인주의와 사람들 간의 고립을 추구했다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들이 고상한 목표와 계획을 지향할 수 있도록 서로 자극을 주면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려 깊지 못하며 경솔하거나 절제를 잘 하지 못하고 동물적 쾌락만을 좇는 사람들은 타인들로부터 제대로 대접받지 못할 수가 있고 그들은 그들에 대한 부정적인 평판을 각오해야 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이유로 비난을 받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즉 그들 자신만의 문제 때문만이 아니라 타인의 권리와 자유를 침해하여 비난받는 이들은 사회의 도덕적 징벌이나 처벌 등의 간섭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사회가 개인에게 사법적 권한을 가질 수 있는 경우는 타인의 이익, 자유, 권리 등을 부당하게 침해하였을 경우로만 한정된다는 것이다. 각 개인 고유의 문제에만 해당하는 일은 전적으로 그의 개별적 자발성에 맡겨 놓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개인의 판단을 돕기 위하거나 그를 경고하는 행위가 전부이다. 타인이 이렇게 그를 위해 생각해주든, 경고하는 조언이나 강요를 하든 간에 어떠한 상황이더라도 그 개인만이 최종 결정권을 가질 수 있다.

밀은 이 같은 그의 주장과 함께 이를 당대 현실에 적용한 예를 제시하면서 『자유론』을 마무리 짓는다. 결국, 우리의 육체, 정신, 영혼의 건강을 보호하는 사람은 각 개인 자신이며 스스로가 정한 길로 나아가다가 그 일이 잘못되면 고통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 역시 자신이 선택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동조만 하면서 그들의 생각대로 인생을 끌려가듯이 살아가는 것보다 자신의 선택에 따른 고통을 맛볼지언정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하여 자신의 의견과 생각의 자유를 보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과도한 의존보다도 자신의 자유를 타인의 자유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우선시하고 그러한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격려하는 듯한 밀의 『자유론』은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 자신만의 의견을 가지고 있고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는 자유를 사회가 보장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반성할 수 있게 해 준다.

공리(公利)는 다양성에서 나온다.

『자유론』은 150년 전의 책이라고는 하지만, 2019년 한국사회에 적용하여도 부족함이 없는 사회원리를 담고 있다. 밀이 말한 '자유론'에 따르면 2011년의 한국사회는 한마디로 자유롭지 못하다. 왜냐면 밀이 말한 자유론의 핵심은 사상의 자유이고 그것의 중요한 가치가 '다양성'이기 때문이다.

'나는 위에서 개성과 발전은 동일하고, 충분히 발달한 인간을 낳고 낳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개성의 신장뿐이라는 점을 설명했으므로, 여기서 나의 논의를 끝내고자 한다.'

밀은 개성과 다양성의 중요성을 말하고 둘의 조합으로 독창성이 나오는데, 이를 사회발전의 원동력으로 말하고 있다. 따라서 공리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개인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국가가 어떠한 형태로건 제약하는 것은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낳게 되어 결국 사회 전체의 공리(公利)가 줄어들게 된다.이는 개인의 다양성 결국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된다.

밀에 관점에서 보면 우리 사회는 자의건 타의건 다양성의 관점에서 보면 치명적인 위험수위에 있다. 청년의 때까지 거의 동일한 방식의 동일한 내용을 주입식으로 받게 되고, 유사한 스펙을 쌓아 취직에 몰두하게 된다. 또한, 이러한 흐름에서 벗어나는 밀이 말하는 개성은 용인되지 못하고 심지어 지탄받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밀의 관점에서 보아 심각하게 자유롭지 못한 한국사회에서 자유의 획득 더 구체적으로 말해 다양성의 획득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밀의 주장에서 해답을 교육엣 찾는다.

“국가가 교육을 강제하는 것과 국가 스스로 교육을 담당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다. 국민 교육 전부나 대부분을 국가가 장악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반대한다. 성격상의 개성과 의견 및 행동방식의 다양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지금까지 내가 설명한 것은, 교육의 다양성을, 역시 이루 말할 수 없이 중요한 것으로 내포한다.”

밀은 사상의 자유만큼이나 국가에 지배받지 않는 교육의 다양성을 강조한다. 이는 벤담의 백지설 영향을 받고 어려서부터 아버지로부터 집중적인 교육을 받은 밀의 성장 내력을 보면 어쩌면 당연한 결론인지도 모른다. 밀에게 있어서 교육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요소가 아니고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전부이기 때문에 교육의 다양성을 힘주어 강조한다. 밀은 개성을 이야기하며 먼저 '관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비록 그 관습이 관습으로서 좋은 것이고, 그에게 적합하다고 해도 단지 관습으로서의 관습에 복종하는 것은 인간에게 부여된 독특한 천부적이니 여러 능력 가운데 어는 것도 자신 속에 교육하고 발견될 수 없게 한다. 무엇을 하든 그것이 관습이기 때문에 한다는 사람은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는 것이다”

밀의 주장에 의하면 지금의 대한민국의 학교 교육이 그러한 관습이 되어 가고 있으로 보인다. 관습이 나쁜 것은 아닌 것처럼 학교 교육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관습이기 때문에 한다는 사람은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는 것이란 밀의 주장처럼 가야 하니까 나이가 되어 학교에 간다는 것은 선택하지 않는 것이며, 거기서부터 다양성이 없어지는 것이다. 지금으로 치면 아버지로부터 고전과 쓰기와 질문을 통한 홈스쿨을 한 밀의 주장이 급진적이고 학교를 부정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질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교육의 폐해를 볼 때 다시금 새겨볼 주장이다.

행복은 쾌락에서 오는가?

『자유론』에서 오해의 여지가 생기는 부분이 바로 행복=쾌락이라는 단순한 공식이다. 쾌락이라는 단어는 니체 이전 기독교 세계관에서 그러하였듯이 현대의 기독교 세계관에서도 그리 올바른 가치로 보이지는 않는 어감이 있다.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도덕이라고 주장한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는 얼핏 인간의 이기심과 무한한 욕망을 간과한 어설픈 쾌락주의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밀의 행복 개념에 내재한 쾌락은 벤담의 그것과는 다른 차원의 쾌락이다. 그의 쾌락은 말초적인 쾌락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것이다. 그는 이 책 전체에 걸쳐 계속해서 주장한다. 인간에게는 명백히 선을 행하려는 욕구가 있고, 그 욕구를 실천했을 때에 얻어지는 만족이 말초적이고 순간적인 쾌락 이상의 것임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그리하여 일정수준 이상의 교양을 쌓고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양측의 쾌락 중에서 선을 행하는 쾌락을 선호할 것이라고 말한다.

밀의 공리주의는 덕과 관련되어 있다. 선을 행하고 이타심을 발휘하는 것이 전체 행복의 증진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을 행하도록 공리주의의 도덕률은 요구한다. 하지만 윤리적인 한계는 더 발견된다. 밀은 이타심을 발휘하는 것이 분명 공리주의 도덕률의 윤리 명제라고 밝히는 한편, 그 행동이 결론적으로 효용의 증대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면 가치가 없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어떤 공적인 역할을 담당한 개인이 아니라면, 이타적 행위 역시 자신의 주변인, 친족, 친구 등으로 우선하여 행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보았다. 이런 점들에서 한 세기 반 이전의 윤리학의 한계가 지적된다. 밀의 목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단 하나의 1차 도덕 명제를 제시하여 그것으로부터 모든 행위의 가치 여부가 연역될 수 있도록 윤리학의 거대 세계관을 성립하려 한 것이었다.

벤담은 현실정치가로서 공리주의를 실제 제도에 적용하려 했다. 하지만 효용의 크기라는 것은 행복의 증진에 달렸고, 결국 행복을 측정하는 기준이 필요할 텐데 그 기준을 실증적으로 마련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벤담은 그 기준을 무리하게 만들어 정치제도에 도입하려다가

이상욱 교수(성산효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Ph. D)

많은 비판을 받았다. 밀은 나름의 기준으로 행복의 가치를 저울질하려 하지만, 그 역시 객관성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정치에서 공리주의의 효용은 무엇으로 대치되었는가? 아주 간단명료한 경제학의 언어가 이를 대신한다. 행복은 생산으로, 따라서 효용은 생산의 증대로 손쉽게 대치된 것이다! 따라서 공리주의 도덕률에 따라 제도 경제학의 윤리는 당연히 생산의 증대로 설명된다. 전체 생산의 증대가 행복을 결정하고, 이 효용이 다른 윤리를 압도한다. 결국, 신자유주의 세계관에 사는 우리는 밀의 공리주의와는 전혀 다른 가치를 좇으면서도 공리주의의 외투를 대충 걸친 제도 경제학의 민낯을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이상욱 gcilbo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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