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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욱 박사의 인문학 산책(29) :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사회질서의 동인을 밝히다.

기사승인 2019.07.11  22:3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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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욱 교수(성산효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철학박사)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하지만, 그 자신은 경제학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20세기에 이르러서야 경제학이 분과학문으로 독립했기 때문이다. 1759년 35세 나이로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으로 명성을 얻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철학자 스미스’라고 불렀다.

그는 당시의 파리와 함께 지식의 중심지인 스코틀랜드에서 세관원의 유복자로 태어나 삼촌에 의해서 양육되었다.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대학을 졸업하고 17세에 잉글랜드로 건너와서 옥스퍼드에서 6년을 공부한다. 옥스퍼드에서 경험론자 데이비드 흄의 책을 보았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할 위기를 겪었다는 뒤 이야기가 있다.

어쨌든 그는 다시 1752년 글래스고대학 도덕철학 교수로 임용됐다. 애덤 스미스에게 가장 영향을 준 교수는 전 시대에 도덕 철학자로 이름을 날린 스미스의 스승 프랜시스 허치슨(Francis Hutcheson)이다. 그는 허치슨 교수의 뒤를 이어서 27세 나이로 도덕철학 교수가 된다.

모교인 글래스고대학으로 돌아온 스미스는 유창한 강의로 학생들의 사랑을 받았다. 당시만 해도 학문이 분과 되지 않았기 때문에 도덕철학은 자연신학, 윤리학, 법학, 경제학 전반을 다루었다. “인간사회의 질서가 어떻게 해서 유지되는가?” “이기적인 인간이 이기심을 누르고 더 높은 차원으로 변화시키는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이것이 도덕감정론의 화두이다. 이 질문에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그 해답을 제시한다. 우리는 어떤 사건을 만날 때, 자신을 제3자 즉 불편부당한 관찰자를 놓음으로써 사건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도덕감정론』은 『국부론』만큼이나 오해의 안개에 싸여 있는 저작이다. 『국부론』이 인간의 이기심을 찬양하는 저작인 데 반해 『도덕감정론』은 이타심을 강조한 저작이라는 것이 그런 오해의 한 양상이다. 『국부론』의 이기심을 『도덕감정론』의 이타심으로 제어하고 교정하려 했다는 것이다. 『국부론』에서 시장 원리주의를 설파한 스미스가 그보다 먼저 『도덕감정론』에서 복지국가론·후생경제학을 주창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애덤 스미스를 이해하는 것은 애덤 스미스의 사상을 통합적으로 인식하지 못한 데서 오는 오류이다.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은 동일한 원리 위에 세워진 중층(重層) 건물과도 같은 저작임을 알아야 한다. 『도덕감정론』은 인간 사회의 질서를 끌어내고 번영을 가져오는 인간 본성에 관해 설명한다. 나아가 인간 본성이 국제적 질서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도 규명한다. 그리고 후작인 『국부론』은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시장 메커니즘의 철학적 배경을 설명한다. 그렇다고 해서 스미스가 인간의 이기심을 무조건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냉정한 경험적 관찰을 통해 이기심의 강력성을 인정하고, 그 이기심이 적정하게 제어되고 공정하게 관리될 경우 사회적 이익 증진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보았을 따름이다.

스미스가 활동하던 시대는 매뉴팩처(공장제 수공업) 시대, 산업혁명의 초기였다. 기술혁신이 일어나고 정치적으로 민주화가 일어는 시기였다. 즉 노동과 자본이 분화되지 않고, 자본가도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고 먹고 자고 하던 시대였다. 스미스가 생각한 ‘보이지 않는 손’의 조화와 질서는 소박한 단순상품생산 시대의 목가적 세계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의 이론을 노동과 자본이 극단적으로 분화된 현대 독점자본주의·금융자본주의 시대에 곧바로 적용하는 것은 잘못을 범할 수 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신자유주의 이론가들이 스미스의 ‘자유 방임’ 논리를 자신들의 근거로 끌어들인 것은 시대착오인 셈이다. 더구나 스미스의 ‘자유 방임’ 주장은 그 시대 상업자본가들의 독점과 특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었다. 그는 이기심이 제어되지 않고 폭주할 때 사회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인애가 없어도 사회는 존속할 수 있지만, 정의가 부재하면 사회는 붕괴한다.” 모든 반칙과 특권에 반대하는 ‘급진적 철학자’가 스미스였다.

도덕감정론』-사회질서의 동인을 밝힌다.

『도덕감정론』은 7부로 되어 있다. 6부는 5판 때 삽입되었다. 30년 동안 수정·보완 작업을 계속하였다. 애덤 스미스의 연구가 도메 다쿠오(堂目卓生)는 이를 3부로 나눈다. 제1부는 『도덕감정론』에서 3개의 강의로 분류한다. 1강은 1~3부를 묶어서 질서를 끌어내는 인간 본성, 2강은 4부를 요약하여 번영으로 이끄는 인간 본성, 3강은 5~7부를 묶어서 국제질서의 가능성으로 분류했다.

그러면 『도덕감정론』의 목적은 무엇인가? 사회질서를 끌어내는 인간 본성은 과연 무엇일까? 이성인가? 아니면 감정인가? 18세기는 이성의 시대이다. 이성의 시대는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이성의 힘으로 깨우자는 시기이다. 이런 시대에 스미스는 사회질서의 기초를 구성하는 원리, 즉 도덕 원리는 감정에 근거한다고 생각했다.

도덕 원리는 허치슨이 주장하는 하나의 특수한 단 하나의 감정(sentiment)이 아닌 여러 가지 감정(sentiments)을 바탕으로 하는 것으로 기쁨, 분노, 슬픔 등 다양한 감정이 상호 작용함으로써 사회질서가 형성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다양한 감정을 가진 인간은 동류의식을 느낀다. 동류의식은 생득(生得)적이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동감할 수 있다. 예컨대 우리는 상대방이 슬퍼하는 모습을 봤을 때 별도의 논리적 절차 없이 본능적으로 슬픔을 경험한다.

이처럼 인간은 동류의식, 즉 공감 능력을 통해 타인의 감정과 행위를 관찰하고 그를 시인(approve)하거나 거부(disapprove)한다. 애덤 스미스는 이 과정을 '동감’이라 명명한다. 동감은 반대의 경우에서도 일어난다. 내가 타인의 감정과 행위의 타당성을 판단하듯 상대방도 나에 대해 동감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나는 타인이 내 감정과 행위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를 고려하고 나아가 그에 동감하기를 기대한다.

동감(sympathy)의 구조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利己的, Selfish)인 존재라 하더라도, 그 천성(天性, Principle)에는 분명히 이와 상반되는 몇 가지가 – 연민(憐憫, Pity)과 동정심(同情心, Compassion)에 속하는 천성 – 존재한다. 타인의 슬픔에 대한 우리의 동류의식(同類意識)을 나타내고자 할 때 쓰는 말이 연민과 동정이다. 애덤 스미스는 모든 종류의 격정(激情, Passion)에 대한 우리의 동류의식을 나타내는 용어로 동감(同感)을 사용한다. 동감은 타인의 고통을 보거나, 또는 그것을 아주 생생하게 느낄 때 우리가 느끼는 종류의 감정이다. 우리가 타인의 슬픔을 보고 흔히 슬픔을 느끼는 것은, 굳이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예를 들 필요조차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도덕감정론 제1부 제1편 제1장).

다른 사람의 비탄이나 희열에 대한 우리의 동감조차도 그가 비탄이나 희열을 느끼게 된 원인을 우리가 알기 전에는 항상 극히 불완전한 것이다. 다만 그의 처지를 알아보고자 하는 호기심을 유발할 수 있을 뿐이며, 그 호기심에는 매우 민감한 실질적 동감이 아니라 단지 그와 동감하려는 어떤 의향이 동반된다. 그에 대한 우리의 동류의식은 아직 그리 크지 않다. 그러므로 동감은 모종의 격정을 목격함으로써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격정을 일으킨 상황(狀況)을 목격함으로써 발생한다.

공평한 관찰자(impartial spectator)

우리는 타인에게 인정받기를 바라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감정과 행위를 타인이 인정할 수 있는 것으로 맞추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누구를 기준으로 맞춰야 하는가? 자신과 관계된 사람들은 매우 많으며 이해관계도 다르기에 모든 이의 인정을 받을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가 자신의 감정과 행위의 타당성을 재는 기준으로 추구하는 것은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은 공평한 관찰자의 인정이다. 그러면 공정한 관찰자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이는 관찰자로서의 경험, 당사자의 경험을 통해 형성된다. 마음속에 공정한 관찰자의 기준을 만들고 그 기준에 근거하여 자신의 감정과 타당성을 판단한다. 그에게 성숙한 사람이란 자신의 기분이나 기호, 또는 자신의 이해관계에 의해서 타인의 행위나 감정을 판단하지 않고 공정하게 판단하는 사람을 일컫는 다.

칭찬과 비난, 그리고 불규칙성의 사회적 의미

행위에 대한 칭찬과 비난 여부는 우연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행위의 동기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는 데다 행위의 결과가 어떤 것이 될지는 우연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좋은 의도로 한 행동이 나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경우처럼 우연은 동기와 결과의 불일치를 초래하기도 한다.

만약 좋은 의도로 한 행위가 나쁜 결과를 만들어낸다면 그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사회는 그 대상을 향하여 비난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 안에 존재하는 공평한 관찰자는 내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으므로 나를 위로하며 칭찬할 것이다. 이처럼 행위 당사자는 한편으로 세상의 칭찬과 비난에 노출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의 칭찬과 비난을 받는다. 이 둘의 평가가 엇갈린다면 우리는 어느 쪽의 평가를 중시할까?

지혜로운 사람과 연약한 사람

스미스는 실제의 관찰자인 세상을 재판의 제1심으로 비유하고, 마음속에 있는 공평한 관찰자를 제2심에 비유했다. 우리는 1심에 해당하는 세상의 평가를 받고 이것이 타당하다 여기지 않는다면 제2심에 해당하는 마음속 관찰자에게 호소하여 최종 판결을 받는다. 지혜로운 사람은 대개 제2심의 판결을 중시하며 연약한 사람은 제1심을 중시한다.

인간이 항상 도덕적 판단을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양면적 존재로, 현명함과 연약함을 모두 지니고 있다. 전자는 자기 규제를 통해 내면의 공평한 관찰자가 자신의 감정과 행위를 시인(approve)하도록 행동하려는 것이다. 반면 후자는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의 시인(approve)과 거부(approve)를 무시하고 세간의 평가에 연연하여 자신을 기만하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기만이라는 치명적 약점에 대응하기 위해 일반적 규칙(general rules)을 형성한다. 일반적 규칙은 정의와 선행으로 나뉜다. 정의의 규칙은 우리에게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를 하지 않도록 지시한다. 선행의 규칙은 우리에게 타인의 이익을 증진하는 행위를 지시한다. 정의는 법으로 제도화되어 강제성을 띤다. 의무감도 정의의 규칙에서 더 강해진다. 애덤 스미스는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존속하는 데 필요한 것은 정의의 규칙이라 주장한다.

선의의 규칙이 없어도 사회질서는 유지될 수 있으나, 정의의 규칙이 구현되지 않으면 사회질서 유지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의가 강제되는 반면, 선의가 권고에 그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는 이처럼 인간의 도덕 감정을 설명하면서도 정의의 규칙 및 법의 필요성을 역설(力說)했다. 또한, 사회 번영도 동감이라는 인간 본성에 기인한다는 것을 주장하며 『국부론』의 학문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사회질서의 기초와 사회 번영

인간은 타인의 감정과 행위에 관심을 가지고, 거기에 동감하는 능력이 있다는 가설이 있다. 동감을 통해 사람들은 마음속에 공평한 관찰자를 형성하고 자신의 감정과 행위가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에게 칭찬받도록, 적어도 비난받지 않도록 노력한다. 그렇지만 인간에게는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의 판단에 따르는 것을 일반적 규칙들로 설정하고 그것을 고려하는 감각, 즉 의무감을 기른다. 특히 정의에 대해서는 그것을 불러일으키는 분노를 제어하기 위해 법을 정하고 법과 의무감에 의해 사회질서가 실현된다.

사회 번영 역시 같은 맥락에서 설명된다. 애덤 스미스는 부자에 대한 부러움의 감정이 일할 동기를 제공하고, 열심히 일하여 부를 축적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사회가 번영한다고 생각한다. 부에 대한 열망의 원천은 허영(vanity)이라는 '연약함’에서 나오지만, 그것이 개인의 부를 증가시킴과 동시에 사회 전체의 부, 나아가 사회 번영을 끌어내는 것이다.

스미스는 개인의 야심이 사회 번영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지만 개인의 진실한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고 보고 있다. 가난한 자의 아들로 태어난 이는 부자의 생활을 보고 그를 목표로 일평생 정진하여 결국 부자가 된다 하여도 부는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못하고 오히려 부가적인 고민과 근심을 안겨준다고 말한다. 스미스의 행복론에 따르면 재물은 최저 생활을 가능할 정도만 있어도 족하다 한다. 행복의 조건은 마음의 평정과 향유 가운데 있다고 말한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자는 재물이 필요한 만큼만 있으면 그 이상의 재물은 그의 행복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연약한 자는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혹은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그 이상의 재물을 구하며 그것이 그의 행복에 영향을 준다고 말한다. 이것은 기만이라고 표현한다. 연약한 자는 부와 야심이라는 도구에 자신의 일생을 기만당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속고 산다는 것이다. 그리고 스미스는 이런 대다수의 연약한 자들에 의해서 사회 번영이 주도된다고 말한다. 결국, 기만당하고 있는 연약한 자들은 자신들의 허영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게 되고 이러한 노력은 사회 번영을 이끄는 원리가 된다는 것이다.

질서와 번영으로 인도하는 인간 본성

인간에게는 바꿀 수 없는 현실의 하나로 현명함과 함께 연약함이 있다. 그리고 연약함에도 현명함과 마찬가지로 수행해야 할 사회적 역할이 있다. 그러나 연약함이 사회적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현명함의 제어를 받아야 한다. 이것이 애덤 스미스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이 입장에 서면 사회의 질서와 번영을 방해하는 다양한 문제를 인간에게 내재하는 연약함의 존재 자체의 탓으로 여기는 게 아니라 현명함과 연약함의 관계로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에 대한 대응책도 현명함과 연약함의 균형이라는 시각에서 생각할 수 있다. 연약함은 방임되어서는 안 되지만 완전히 가두어버려서도 안 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탐욕과 이기심이 존재하며 그리고 세상의 이목을 중시하는 연약한 면이 있다. 그리고 우리 안에는 정의를 지키고 우리 행위의 적합성과 타당성을 감찰하는 현명함도 함께 있다.

연약한 면은 자기 유익을 위해 열심히 일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며 더욱 넓게는 사회를 번영시키는 근원이 된다. 하지만 자기 유익만을 위해서 살게 된다면 잘못된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이를테면 나의 이익을 위해서 상대방을 해하는 것, 등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내 안의 공평한 관찰자에 의해서 제어가 될 수 있다. 양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내가 이해하기에) 이러한 공평한 관찰자가 우리가 우리 욕심대로만 행하지 못하도록 하는 감찰기관이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스미스는 우리 안에 내재한 본성들의 상호작용 때문에 사회가 번영되며 또한 유지된다고 도덕감정론에서 설명하고 있다.

공감하는 사회가 미래다.

근대국가의 이론적 틀을 최초로 제시한 홉스(Thomas Hobbes)는 영국의 현실을 지켜보며 인간을 움직이는 작동원리는 `선`이 아닌 `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는 인간들을 자연 상태로 그냥 내버려 두면 자신의 이익과 생존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일어난다고 말했다. 물론 이 투쟁에는 심판도 규칙도 없다. 이 같은 혼란스러운 공포 상태를 피하고자 사회계약을 바탕으로 한 막강한 국가가 있어야 한다는 게 홉스의 생각이었다.

반면에 자유주의자들은 인간 내부에 사회질서를 유지할 힘이 있다고 보았다. 스미스가 규명하려고 하는 것은 이기심이 사회적 조화와 질서를 깨뜨리지 않고 개인의 발전과 사회의 발전을 동시에 가져올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스미스는 동감의 원리가 이기심을 조절할 수 있으므로 그런 조화와 발전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마치 중력의 법칙에 따라 하늘의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질서 있게 운행하듯이, 인간의 이기심도 질서에 어긋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도덕감정론』의 이런 규명 위에서 『국부론』의 논의가 펼쳐진다.

일반적으로 『국부론』에서 국가의 간섭이 없다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시장에서 가격이 결정되기 때문에 그것으로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경제 상태가 이뤄진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도덕도, 양심도 없이 개인의 이기주의만이 통용되는 시장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데 인용되기도 한다. 심지어 신자유주의의 선조로 거론되기도 한다. 스미스의 시장을 오직 이윤추구의 이기적인 인간들만이 득실대는 살벌한 세계로 이해하는 이유는 당대에 그를 유명하게 만든 『도덕감정론』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이상욱 박사(성산효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의 인간은 도덕적 감성인 동감을 갖는 존재임을 밝힌다. 인간은 동감의 감정을 소유하고 있기에 남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범위에서 자기 이익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감추기도 한다. 자유주의 원칙에 충실한 것이다. 또 그렇기에 인간은 사회공동체에서 함께 살아왔고, 그리고 인간사회의 미래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동감의 사회는 나 홀로 잘사는 사회가 아니다. 동감사회는 함께 더불어 사는 사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사회의 동인이 된다.

 

이상욱 gcilbo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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