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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욱 박사의 인문학 산책(24) - 『로마제국쇠망사』 : 로마는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았다

기사승인 2019.06.05  13: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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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욱 교수(성산효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철학박사)

이상욱(성산효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Ph. D)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1737년~1794년)은 누구인가?

시오노 나나미의 말처럼 “지성은 그리스보다 못하고 체력은 켈트나 게르만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아보다 못하고 경제력은 카르타고보다 뒤떨어진” 로마가 어떻게 역사의 중심이 될 수 있었을까?

작은 도시국가였던 로마가 특유의 개방성을 바탕으로 대제국이 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다. 그 긴 시간 수많은 역사적 사건과 격변과 합종연횡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때문에 나온 속담이 바로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라는 말이다. 이처럼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멸망하는 데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로마가 망하기까지는 복합적이고 지루한 사건들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로마 멸망의 이유를 분석한 이론이나 저작은 무수하게 많다. 지금도 수많은 역사학자가 이 주제에 매달려 있다. 하지만 이제까지 나온 로마 멸망에 관한 그 어떤 저작도 에드워드 기번(1737~1794)의 『로마제국쇠망사』를 따라갈 수는 없다. 그만큼 『로마제국쇠망사』는 유려하고 방대하다.

옥스퍼드대학을 중퇴하고 영국군 장교로 복무한 에드워드 기번은 1764년 노을이 지는 로마 유적을 바라보며 로마 멸망에 관한 책을 쓰리라 마음먹는다. 그로부터 에드워드 기번이 집필준비와 출간까지 20년에 걸려 6권짜리 『로마제국쇠망사』를 세상에 내놓는다. 이 책은 기원후 2세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6황제 시대-5현제와 콤모두스)부터 콘스탄티노플 함락까지 1400년의 로마사를 다룬 이 책은 뛰어난 역사서이자 훌륭한 문학작품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다.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는 영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역사책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아무래도 시대가 시대인지라 현대 역사학적으로 보면 기번의 역사를 보는 관점은 아주 낡은 편이다. 그러나 기번의 문장은 명문장으로 꼽히었으며 그리고 영국 역사상 많은 명사가 『로마제국쇠망사』를 읽었다.

윈스턴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여러 번 『로마제국쇠망사』를 통독했으며, 인도의 독립을 인정하고 처칠에서 정권을 물려준 영국의 정치가.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Richard Attlee)도 북아일랜드 분리 독립 문제라는 난제를 놓고 『로마제국쇠망사』를 두 번 통독하고 결론을 얻었다고 할 정도다. 러시아 태생의 미국 작가로 과학소설과 교양과학 분야에서 눈부신 성공을 거두어 세계적 명성을 가진 아이작 아시모프(Issac Asimov, 1920~)도 그의 소설 『파운데이션』(Foundation)을 쓸 때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러면 기번은 로마제국의 흥망성쇠의 요인을 무엇이라고 보는가? 기번이 다룬 1400년이라는 장구한 기간뿐만 아니라 서술의 규모도 실제로 어마어마했다. 황제들의 이야기는 물론, 그리스도교의 확립, 게르만족의 대이동, 이슬람의 침략, 몽골군의 서방 원정, 십자군 전쟁에 이르기까지 서구역사의 전반을 종횡으로 누빈다.

여기에 역사학자로서의 통찰과 준수한 문장까지 보태져 『로마제국쇠망사』는 흔들리지 않는 명저의 자리를 차지한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외래의 피를 섞지 않고 시민의 순수한 혈통을 유지하려는 편협한 정책 때문에 더는 번영하지 못했다. 그러나 로마는 공허한 자존심 대신 야망을 택했다. 로마는 노예나 이방인, 적이나 야만족 모두의 장점과 미덕을 취해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 더 사려 깊고 영예로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기번은 바로 이 현실적 개방성이 로마가 제국이 될 수 있었고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때문에 서서히 멸망해갔다고 보았다. 개방성은 제국을 가능하게도 했지만, 제국을 멸망하게도 했다. 이것이 역사의 순환이다. 기번이 『로마제국쇠망사』에서 거론한 로마 멸망의 원인은 복잡하고 다양하다. 하지만 근본은 하나다. 결국, 규모와 그 규모를 유지하기 위한 관계 속에서 멸망한 것이다.

로마라는 거대한 골조가 그 규모와 연결고리의 무게감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내린 것이다. 멀리 떨어진 변방에서는 그곳에 로마를 이식하기보다는 오히려 동화될 수밖에 없었고, 각 지역으로 퍼져나가 이민족과 융화된 로마군단들은 오히려 로마 공화정을 위협하는 존재가 됐다. 권좌를 유지하는 데 급급했던 황제들은 단호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미봉책으로 일관했고, 그러는 과정에서 로마정신은 서서히 훼손되어 갔다.

기번은 가라앉기 시작하던 로마의 멸망을 재촉한 것이 그리스도교의 대두였다고 본다. 사회가 혼란스러워지자 비관에 빠진 사람들은 내세 지향적인 그리스도교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고 점점 현실을 체념하기 시작했다는 것. 이것은 결국 로마의 가장 큰 장점이었던 현실주의를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시각이다. 사실, 기번은 이 부분 때문에 기독교로부터 불경스럽다는 비판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가 탐구한 건 제국을 흥하고 망하게 하는 사회 심리적 현상이었지 특정 종교에 대한 비판은 아니었다. 이러한 면에서 기번은 역사라는 거대한 숙명적 순환고리를 가장 정확하게 간파한 선구자였다.

『로마쇠망사』-1400년의 대서사시

 로마제국은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취임하면서 출범하였다. 로마제국 이전의 고대 로마는 기원전 753년 로물루스에 의하여 건설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이 무렵 로마의 여러 언덕에 마을들이 들어섰고, 서로 통합되어가면서 기원전 7세기 무렵 도시국가 형태의 왕국이 성립하게 된다.

기원전 500년경에 왕국이 무너지고 귀족과 평민계급이 같이 참여하는 공화정을 세웠다. 평민과 귀족들은 투쟁과 타협을 이어가면서도 기원전 272년경에는 반도를 통일하기에 이르렀고, 이후 150여 년간의 정복 전쟁을 통하여 갈리아, 카르타고 등을 정복하면서 지중해 전역을 제패하였다. 기원전 1세기 중반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하여 시작한 삼두정치가 공화정을 기틀을 흔들면서 제국 성립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로마제국은 5현제 시대(서기 96년~180년)에 융성하여 최대의 강역을 이루었다. 서기 29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효율적 관리를 위하여 제국을 동부와 서부로 나누고 각각 두 명의 황제와 부제가 지배하는 사두체제를 도입하였다. 하지만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인 395년 동로마 제국(비잔티움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갈라서고 말았다.

서로마 제국은 476년 게르만족의 오도아케르에 의하여 멸망하였으며, 동로마 제국은 1453년 오스만제국에 멸망하였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가장 큰 이유로 게르만 이주민들의 반란을 꼽는 경향이지만, 기번은 로마제국의 국력이 쇠퇴하게 된 근본 원인이 복합적이라고 보았다.

과거에는 서기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로마제국의 명운이 다했다고 보았다. 동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고대에서 중세로의 이행이 수 세기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면서 동로마 제국의 존속에 의미를 부여하는 경향이다. 『로마제국쇠망사』에서 다루고 있는 로마제국의 쇠망 과정이 동로마 제국까지 포함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도 『로마제국쇠망사』에도 18세기 유럽 역사학자들이 동로마 제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의 흔적이 남아있다.

기번은 5현제 시대까지의 로마제국을 ‘위대한 인류의 견고한 구조물’이라고 비유하였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평범한 진리처럼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은 견고한 구조물도 세월의 풍상에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묘사한다. 저자는 1453년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제국에 멸망하기까지 1,300여 년에 이르는 장구한 세월이 흐르면서 로마제국이 무너져가던 과정을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하였다.

첫 번째 시기는 트라야누스 황제와 안토니우스 황제 무렵 시작하여 지금은 가장 세련된 유럽 국가들의 야만적 선조라 할 게르만족과 스키타이인들에게 서로마 제국이 전복되었던 시기까지를 구분한다. 고트족 정복자들이 일으킨 변혁은 대략 6세기경에 완성되었다고 보았다.

두 번째 시기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동로마 제국의 영광을 일시적으로 회복시킨 이후 롬바르드족의 이탈리아 침입과 이슬람 세력이 소아시아에서 아프리카를 지나 이베리아반도까지 침략하던 시기를 포함하여, 서기 800년 게르만의 서로마 제국을 건설한 샤를마뉴가 등장한 시기까지이다.

세 번째 시기는 서로마 제국이 부활했던 시기로부터 오스만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여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기까지의 시기로 대략 650년 정도에 이른다고 보았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쇠망사』 1권에서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그리고 두 명의 안토니누스 황제로 이어지는 80여 년의 행복한 시기(서기 98-180년)로부터 4세기 초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퇴위 이후 혼돈에 빠진 제국을 추스르기까지의 시대를 담았다. 황금기를 지나면서 로마제국의 황제들은 근위대의 무력에 기대어 제위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근위대의 기대치에 따라서 황제가 바뀌는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났던 것 같다.

2권에서는 밀라노칙령을 내려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대제가 비잔티움을 새로운 로마의 수도로 공표한 서기 324년부터 훈족에 밀려난 고트족이 로마의 영역에 자리 잡은 서기 395년까지의 시기를 다루었다. 주목할 점은 그리스도교의 공인과 이어 벌어진 삼위일체를 둘러싼 교리 다툼으로 그리스도교 안에서 다양한 파벌이 갈등하고 대립하는 모습이다. 그리스도교가 타 종교에 배타적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같은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다른 교리를 가진 세력들이 갈등의 수준을 뛰어넘을 정도의 대립을 보였다는 것이다.

3권에서는 제국의 변방에 살던 고트족, 반달족 등이 세력을 얻어가는 과정, 아시아에서 이동해온 훈족의 영향, 그리고 서로마 제국의 멸망 등을 다루었다. 이 무렵에 로마제국의 황제들은 통치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향락을 탐닉했다. 궁정은 물론 속주에 이르기까지 매관매직과 부정이 일상적인 것이 되었지만, 이들의 죄를 물을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국정 장악능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저자는 진정한 의미의 로마는 아우구스투스와 콘스탄티누스의 마지막 후계자인 테오도시우스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렸다고 기술한다.

4권에서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이탈리아반도를 무대로 벌어진 다양한 민족들의 각축전과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동로마 제국의 서방 정복 운동 등을 다루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동고트, 프랑크, 롬바르드족, 반달족 등이 이탈리아반도를 차례로 침공하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테오도리크왕이 다스리던 시절 동고트족은 로마를 점령하는 등 기세를 올렸지만, 그의 사후 빠르게 무너져 금세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것을 보면 과거 한 나라의 운명은 지도자의 영명함에 달려있던 것 같다.

5권에서는 프랑크족의 이탈리아 정복에 이은 신성로마제국의 성립과정을 다루는 것으로 시작한다. 한편 헤라클리우스 황제 이후 비잔틴 제국은 끊임없이 강역이 줄어드는 모습을 보였는데, 전성기의 로마제국을 이끌던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황제가 없었고, 고만고만한 인물들이 제위를 둘러싸고 권력 싸움이나 벌이는 치졸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라비아반도에서 시작된 이슬람교가 아랍 부족들을 하나로 묶어내면서 서쪽으로는 아프리카 북부를 거쳐 이베리아반도까지, 동쪽으로는 인도 북부까지 무서운 기세로 강역을 넓혔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비잔틴의 영토는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6권에서는 교황의 주도로 전개된 십자군 전쟁의 본질과 십자군이 동로마 제국에 미친 영향으로 시작하여 비잔틴 제국, 즉 동로마 제국의 내부적인 갈등, 몽골제국의 성립과 유럽원정 그리고 티무르의 사마르칸트제국의 성쇠에 이어 오스만제국의 성립, 교황에 의하여 주도된 라틴교회와 비잔틴 제국의 동방교회 통합 논의, 오스만제국에 의한 비잔틴 제국의 멸망, 12세기 이후 로마에서 벌어진 교황의 세속지배와 교황청의 아비뇽 시대와 로마로 복귀하게 되는 과정을 다루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로마제국의 영토는 당시 문명을 이룩하고 있던 지역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영토를 유지하기 위한 로마의 관료제와 잘 훈련된 로마군, 법, 교통망은 근세 이후에야 유럽의 국가들이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로마의 교통망은 가히 신화적인 것이었다.

그 당시 만들어진 도로를 지금도 쓰고 있는걸 봐도 당시의 문명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로마의 상업활동은 멀리 중국에까지 진출할 정도로 활발했다. 마치 영원히 번영할 것처럼 보였던 로마였다. Latium 지방의 작은 도시 공동체로 출발하여 로마는 400여 년의 세월의 끝에 전 지중해 세계를 포괄하는 大帝國을 건설하였다.

로마제국의 멸망은 역사가뿐 아니라 신학, 문학, 경제학, 철학, 지리학, 생리학 등 여러 분야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왔던 만큼 로마제국의 멸망은 다양한 측면에서 그 원인이 제기된다. 그런데 제국의 쇠퇴가 이미 1세기 이래 로마인들 스스로가 감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아주 흥미롭다.

예컨대 호라티우스는 로마인들이 날이 갈수록 점점 사악해져 간다고 한탄했고, 세네카는 이제 로마제국은 병들어 남은 것은 사멸밖에 없다고 하였다. 특히 군인 황제기의 혼란 속에서 황제들의 ‘영원한 로마(Rome Aeterna)’와 ‘황금시대로의 복귀(saeculum aureum novum)’ 라는 거창한 구호에도 불구하고, 로마인들은 로마의 쇠망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느끼고 있었다.

기번은 긴 서사를 맺으면서 로마제국의 쇠하게 된 것은 ①군사 전제 정치의 무질서, ②그리스도교의 생성과 확립, ③콘스탄티노플의 건설과 제국의 분열, ④게르만과 스키타이 야만족들의 침략과 정착, ⑤이슬람교의 창시, ⑥교황의 세속 통치, ⑦십자군 원정, ⑧사라센과 튀르크인의 정복 등이 주요 요소였다고 정리한다.

교회 타락과 로마제국 몰락

 로마제국이 역사 해부의 대상으로 인기가 있는 것은 로마가 역사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로마 초기 공화정(共和政)을 지키기 위해 왕정복고의 음모에 가담했던 두 아들을 처형한 집정관 브루투스의 강직함은 많은 사람의 감동을 자아낸다.

카르타고를 불태운 뒤 스키피오의 탄식, 키케로의 웅변, 옛 애인의 아들까지 암살에 가담시켰던 시저의 최후, 네로의 박해와 기독교도들의 처절한 순교 등 로마는 영원의 도시이다. 그 자체가 무대이며 역사의 드라마인 것이다.

무한한 권력투쟁으로 점철된 로마제국의 긴 역사의 무대에는 위인(偉人)과 악인(惡人)이 교대로 등장한다. 일개 군졸 출신이 황제가 되고, 웃음을 팔던 여인이 하루아침에 황후가 되기도 한다. 거기에다 인간의 미덕과 악덕이 단속적(斷續的)으로 나타났던 역사적인 제국이었다.

230여 년 전에 에드워드 기번도 공화정의 붕괴가 로마제국 멸망의 근본 원인이라고 했다. 그는 권력이 균형을 갖추고 자유가 있어야 국민이 경쟁심과 용기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또한, 번영은 부패의 온상이고 제국 파멸의 원인은 정복의 확대와 함께 증대했으므로 로마의 번영은 제국 쇠망의 종자를 처음부터 잉태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A.D. 313년을 전후로 하여 로마제국은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결정은 종교적 신앙심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정치적 계산에 의한 것이었다고 봄이 옳다. 거대한 로마제국의 판도 안에서는 이 종교 저 종교가 여러 민족 사이에 잡다하게 퍼져나갔다. 그러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스코틀랜드로부터 소아시아에 걸쳐 광대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로마제국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데 기독교가 안성맞춤의 종교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國敎)처럼 되자, 기독교회는 곧바로 놀라운 조직력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정치적 행정 단위와 비슷한 여러 교구(敎區)로 구성된 교회는 잡다한 로마제국의 인종들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데는 성공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로마제국의 번영에 도움을 준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가 로마를 지배하게 되면서, 중세기적 암흑시대의 전조(前兆)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기독교의 교부(敎父)들은 우민정책(愚民政策)을 폈기 때문에 읽고 쓰는 일은 오직 귀족과 사제들의 전유물이 되었고, 일반 백성들에게는 전혀 교육을 베풀지 않았다. 또한, 무엇을 읽고 무엇을 쓸 것인가 하는 문제가 순전히 교회의 결정에 따라 좌우되었기 때문에, 다양한 문화의 발전은 생각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직 죽은 뒤에 내세에서 받을 하나님의 심판에만 목을 매고 살아가는 인질의 신세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교회는 로마제국의 국가 시스템뿐만 아니라 국민의 영혼 깊은 곳까지 지배하고 있었다. 따라서 로마제국의 멸망의 결정적인 요인은 교회의 타락이 아닐 수 없다.

 

이상욱 gcilbo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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