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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욱 박사의 인문학 산책(23) - 『맹자』 :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기사승인 2019.05.29  22: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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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욱 교수(성산효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철학박사)

이상욱 박사(성산효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Ph. D)

맹모단기지교(孟母斷機之敎)

제자백가는 모두 학문과 사상에서 나름 큰 성과를 이룬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어린 시절에 어떻게 자랐고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 알기 어렵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간혹 몇 살 때에 글을 읽고 문장을 지었다는 그들의 천재성만 기록에 남아 있을 뿐, 무얼 보고 어떻게 생각했는지 발달 과정은 찾기 힘들다.

반면 맹자의 경우 많지 않지만 지금까지 몇몇 고사가 알려져 그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추측이 가능하다. 맹모는 자식 교육을 위해서 세 번이나 이사를 다닌 적극적인 어머니였다. 맹모단기지교(斷機之敎)라는 말이다. 맹자(孟子)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그러나 어머니의 지극한 교육열에 힘입어 유학을 떠났다.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를 한 지 오래지 않아 엄마가 보고 싶어 집으로 돌아왔다. 쪼들리는 형편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아들을 공부시켜 인재를 만들고자했던 어머니의 소망이 무너지려는 순간이었다. 그때 베를 짜고 있던 어머니가 맹자에게 물었다.

“공부는 마쳤느냐?” “아닙니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 왔습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즉시 칼을 들어 짜고 있던 베를 끊어버렸다. 오랫동안 공을 들여 짜던 베는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북이며, 바디며 잉앗대가 와르르 바닥으로 흘러 내렸다. 맹자가 놀라 물었다. “어머니, 무슨 영문인지요?” “네가 공부를 그만둔 것은 내가 오랫동안 고생해서 짜던 베를 이렇게 자르는 것과 같다.”

사람이 학문이 닦지 않으면 도둑이 되거나 남의 심부름꾼밖에 될 것이 없다는 것을 타일렀다. 맹자는 충격적인 눈앞의 광경과 어머니의 뼈의 사무칠 듯한 교훈의 말씀에 깊이 깨닫고 결심한 바가 있어 곧 그 길로 다시 길을 떠나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의 문하(門下)에 들어간다. 맹자는 100여년 떨어진 공자를 만난 것이다. 맹자는 공자에 비해 약 3세대 뒤에 나타났지만, 고향이 그렇게 멀지 않았던 덕분에 그의 글만이 아니라 이야기 또한 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제자백가는 너도나도 공자의 한계를 밝히며 비판에 열을 올렸지만 맹자는 거꾸로 인의(仁義) 도덕을 설파하는 공자 안에서 자신이 갈 길을 찾았다. 유교를 ‘공맹의 도’ 일컬을 만큼 맹자는 공자의 충실한 제자이다. 공자가 무질서한 사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인(仁)과 서(恕)와 함께 예(禮)의 실천을 더 특별하게 역설했지만 맹자는 인의(仁義)와 함께 왕도정치를 강조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맹자는 인(仁)을 주장한 공자를 계승하면서 의(義)를 추가로 부각시켰다. 양혜 왕이 그를 처음 만나서 “장차 무엇을 가지고 우리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겠는가?” 묻자 “왜 하필 왜 이로운 것을 가지고 말씀하십니까? 역시 인의(仁義)가 있을 뿐입니다.”라고 반박한 데 그의 핵심 철학이 드러난다. 인의(仁義)에 바탕을 둔 왕도정치(王道政治)대한 강조가 『맹자』의 전편에 반복된다.

인(仁)은 ‘내가 남과 하나가 되는 마음이다’ 인(仁)은 마음의 본질이자 삶을 영위하는 근본 바탕이 된다. 그러면 의(義)는 무엇인가? 의(義)는 인(仁)을 실천해 내는 구체적인 원리가 된다. 의(義)는 불인(不仁)한 상황을 해소하는 행동이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인(仁)의 단서가 된다.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의(義)의 단서가 되며, 사양지심(辭讓之心)은 예(禮)의 단서가 되고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지(知)의 단서가 된다. 바로 사단(四端)이다. 이 사단을 실천하는 삶은 아름다운 삶이 된다. 이는 백성이나 천자나 모두 요구된다.

성선설(性善說)과 교육관

인간이 선한 존재인가? 악한 존재인가? 이것이 왜 중요한가? 이에 따라서 크게 교육시스템, 정치시스템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순자(荀子)는 유가 계통을 잇는 사상가였으나 성악설을 내세웠다면 맹자는 성선설(性善說)이 맹자 사상의 중추를 이루고 있다. 성선설을 주장한 대표적인 사람은 맹자뿐만 아니라 Rousseau를 들 수 있다. 맹자는 인간은 누구나 선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은 측은히 여기는 마음, 사양하는 마음, 부끄러워하는 마음, 시비를 가리는 마음인 사단(四端)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이 선한 존재인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제 사람들은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는 것을 힐끗 보기만 해도 모두들 겁을 내고 측은한 마음이 생기는데, 그것은 그 어린아이의 부모와 친교를 맺으려고 하기 때문도 아니고, 동네 사람들과 벗들로부터 칭찬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도 아니고, 그 아이가 지르는 소리가 역해서 그러는 것도 아니다.<公孫丑 上 不忍人之心章>」 그냥 본능적으로 아이를 구하고자 하는 이유는 그 마음속에 측은지심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맹자에게 선한 본성(本性)을 적극적으로 확충시켜 나가는 것이 교육이다. 가령 「자기에게 이 네 가지 단서(端緖)(즉 仁義禮智의 사단四端)가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것을 확충시킬 줄 알게 마련이다. 그것은 불이 처음 타오르고 샘이 처음 솟아나는 것과 같아서, 정녕 그것을 확충시킬 수 있기만 하면 사해(四海)를 편안하게 하기에 충분하고, 정녕 그것을 확충시키지 않는다면 부모를 섬기기에도 부족하다.

맹자는 이렇게 선한 본성(本性)의 발단과 적극적인 확충과 소극적인 저상(沮喪) 방지를 기회 있는 대로 논해서 인간만사를 선한 본성(本性)에 따라서 처리할 것을 확고한 신심信心을 가지고 권면했다. 맹자는 『진심 하』의 <山徑之磎間章>에서 「산길 사람 발자국 난 틈바구니 갑작스레 다니게 되면 길이 되지만, 잠시 동안 다니지 않으면 도로 막혀버리게 된다.」는 말을 했다. 아무리 인간이 선하게 태어났다 하더라도, 자기수양을 통해 덕을 키우지 않으면 짐승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맹자에게 교육은 본래적인 선함을 계발하고 유지하여 그것을 발현케 하는 것이 교육이다.

이와 반대로 순자(荀子)는 유가 계통을 잇는 사상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맹자를 비평하며 성악설을 내세웠다. 『순자』의 <성악편>에서 「사람의 본성(本性)은 惡하다, 그 善한 것은 작위적(作爲的)이다」고 명백히 말하고, 마치 맹자가 사단(四端)을 든 것같이 순자는 사람은 이(利)를 좋아하고, 증오(憎惡)하고, 성색(聲色)을 좋아하는 세 가지 본성(本性)의 惡한 면을 들었다. 그래서 사람은 쟁탈과 잔학과 음란이 생기고 사양과 충신과 예의가 짓밟힘을 말했다. 순자에게 교육은 인간이 아무리 악하게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교육과 법을 통해 악을 몰아내면 짐승과는 다른 인간이 되게 하는 것이다.

맹자와 순자의 본성(本性)에 대한 주장은 도저히 타협될 수 없는 양극단에서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맹자와 순자는 약간의 연대 상의 선후는 있으나 다 사회와 정치가 혼란을 극했던 전국시대에 태어났다. 이들은 백가가 쟁명 하는 사상계의 혼잡 속에서 살았다. 그러므로 그러한 혼란과 혼잡을 숙정하고 공자의 인의 태도를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관심이 자연 인간의 본성(本性)은 본질적으로 어떠한 것이냐 하는 문제로 집중하게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에 입각해서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자각과 노력이 요구된다. 실효를 거두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은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인간이 선해질 수 있다는 가능에 대한 무한한 신심(信心)을 지니고 있어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준다. 동시에 사람들을 자기발전을 지향하도록 줄기차게 고무해 주는 힘이 있다.

순자의 성악설에 따르면 자연 규제와 교정이라는 밖으로부터의 힘에 의지하는 방향으로 질서유지를 위한 작용이 전개되므로 강압에 의한 실효를 거두기는 쉽다. 그래서 절대전제를 합리화시키고 자발적인 노력을 감쇄시키는 폐단을 초래할 기미를 내포하고 있다. 순자(荀子)의 학설은 학술적인 심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세에 그리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맹자의 학설은 순자(荀子)에 비해 논의상 비약이 심한 편인데도 후세에 널리 환영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맹자는 사람의 본성(本性)은 善하다는 확신을 기본으로 하여, 모든 사람이 다 선해질 수 있다는 인간의 가능성에 대하여 무한한 기대와 불변하는 신심(信心)을 가지고 마키아벨리와 같은 패도(覇道)를 배격하고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시를 고취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반성과 자책을 통해 잃어버린 양심을 수습하고 선(善)으로 복귀할 것을 권면하였다. 맹자의 이러한 티 없는 선의에서 우러난 사상과 그것을 토대로 하여 설정된 여러 가지 방책은 정치제도, 사회정세, 경제정책, 문교시책, 생활태도, 학술문화 등등 실로 다방면에 걸쳐 선명하게 반영되었고 정확하게 논의되었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어떤 본성을 가진 존재인가 사람다운 사람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이런 질문은 교육현장 가운데 최대의 관심사이다. 교육의 관심은 사물이 아닌 인간이다. “인간다운 인간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은 평범하면서도 중요한 명제이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단순한 생물학적인 존재로서가 아니라 인격적인 존재, 자아실현적인 존재, 전인적 성장의 존재 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인간다운 인간’을 위한 교육은 교육의 본질이자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순자에게 사람의 본성은 악하며 그것이 선한 것은 인위적인 것이다. 지금 사람의 본성은 나면서부터 이(利)로움을 좋아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따르기 때문에 쟁탈이 생겨나고 사양하는 것이 없어진다. 나면서부터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따르기 때문에 잔적이 생기고 충과 신이 없어진다. 나면서 이목의 욕망을 갖고 있어서 소리와 색깔을 좋아하는데, 이것을 따르기 때문에 음란이 일어나고 예의와 문리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사람의 본성을 따르고 사람의 정을 따른다면 반드시 쟁탈로 나아가게 되어 분수를 무시하고 이치를 어지럽히는 데로 합쳐져 난폭함으로 귀결된다. 따라서 반드시 장차 사법의 교화와 예의의 도가 있어야 한다. 그런 후에야 사양으로 나아가고 문리에 합치되고 다스림으로 귀결된다. 이것으로써 살펴본다면 사람의 본성이 악한 것은 분명하며, 그것이 선하게 되는 것은 인위적인 것이다.

수많은 철학자들과 현인(賢人)들 또한 ‘인간다운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숙고해 왔다. 루소(Rousseau)는 실질도야(實質陶冶)에 앞서서 일반인도야(一般人陶冶)를 주장하고, 인간교육이 직업교육이나 기술교육에 앞서서 실시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기술인이나 직업인. 그밖에 어떠한 인물이 되기에 앞서서 먼저 ‘인간다운 인간’이 되어야 사회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하나의 결정적 답이 없다는 것은 관점을 바꾸면 인간이란 그만큼 다양한 존재임을 뜻하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human nature)에 대한 소박하고 원초적인 이해의 관점은 인간의 본성이 선한가(性善說) 악한가(性惡說) 아니면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가(不善不惡說)에 대하여 많은 논의가 있다.

공부하는 인간에게 희망을

성선설과 성악설의 생성 배경은 춘추전국시대이다. 주나라의 종법체제가 혼란스러워지고 도전을 받으면서 수십 개의 제후국들이 패권을 지향하며 쟁투를 벌이는 시기이다. 춘추전국시대는 진나라의 건국으로 종결된다. 춘추전국시대에 제후국들 간의 전쟁은 일상적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다. 전쟁 중에 죽고 다치며 희생당하는 것은 일반 백성들이 대다수라는 것이다. 가정이 파괴되고 부부가 헤어지며 마을이 황폐해 지고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죽어나갔다. 가히 지옥이었다.

이런 지옥 같은 시절을 겪으면서 어떻게 해야 이 참상을 넘어설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여 나온 것이 성선설과 성악설이다. 인간의 본성은 선하므로, 어떻게 이 선한 본성을 확산시키고 깊게 하여 전쟁의 참상을 막을 것인가 하는 것이 성선설의 근본적 지향이었다. 반면에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면, 어떻게 이 악한 본성을 억제하고 막아서 선한 행위로 이끌어 평화로운 시대를 가져올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성악설의 모색이었다. 맹자나 순자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는 달라도 교육에서 그 해결책을 찾는다는 점은 동일하다. 맹자가 말하는 교육론은 무엇인가? 그것은 맹자의 군자삼락에 잘 드러나 있다.

맹자는 군자에게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고 하였다. 첫째는 부모님이 모두 살아계시고 형제에게 별 탈이 없는 것이다. 개인의 존재 근거의 혈연, 즉 부모 형제 자매와 관계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이 우주 자연 속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아는 즐거움이다.

둘째는 위로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다. 이 즐거움은 자신의 현실적 삶을 부각시킨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과연 떳떳한가? 내가 이 사회를 살아가면서 부여받은 소명은 무엇인가? 자기 양심에 기초하여 떳떳한 삶을 지속하려는 자기 확인과 충실의 단계이다.

셋째는 천하의 영재를 가르치는 것이다. 이 즐거움은 다른 사람에 대한 교육으로 자신의 삶을 타인과 함께 하려는 타자에 대한 배려와 이해의 삶을 담고 있다. 무엇이 나에게 부여되어 있고 타자에 대해 내가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 세 번째의 즐거움의 차원은 바로 타자를 지향하고 있다.

맹자의 언급에서 세 가지 즐거움은 건전한 인격으로 성숙한 한 인간의 삶의 과정으로 노정된다. 교육은 그런 차원에서 인간이 상정할 수 있는 최고의 위치에 존재한다. 교육은 개인적 수양인 동시에 자신의 인덕과 학덕을 후세에 전수하여 사회에 기여하는 데 무게 중심이 있다. 그것은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윈win-윈win의 전략이요. 상생(相生)의 예술이다. 교육학적으로 본다면 개인교육과 공동체 교육이 통일성을 확보하는 공부의 세계, 삶의 여정이다. 이는 노무현 대통령 묘비명에서 말한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이상욱 gcilbo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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