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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기] 연휴를 이용해 방문한 곳들(5) - 함평 김철기념관과 상해임시정부 청사

기사승인 2019.05.15  17: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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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재(본 신문 발행인, 철학박사)

증도 문준경기념관 근처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문준경 전도사 묘소를 참배하고 짱뚱어다리와 증도갯벌생태전시관을 둘러본 뒤 오후 1시 30분 슬로시티(식당)에서 맛있게 식사를 했다. 기념관 김헌곤 관장이 대접하는 것이어서 더  의미가 있었다. 이 자리에는 최장원 목사도 합류했다.

함평군에 있는 김철기념관과 함께 상해임시정부 조형물이 실지 크기로 재현되어 우리를 맞고 있었다(김철기념관 안내 리플릿 표지).

다음 행선지는 함평 김철기념관이었다. 역사에 관심을 갖고 있는 우리 일행을 위해 최 목사가 특별히 준비한 투어 일정이었다. 고속도로를 자동차로 1시간 정도 달려온 것 같다. 함평군 신광면 일강로 873-12(구봉마을)가 일강김철기념관(一江金澈記念館)과 상해임시정부 모형 건물을 재현해 놓은 곳이다.

상해 임시정부 청사엔 가본 적이 없다. 그곳 청사를 그대로 옮겨 놓았다고 하니 얼마나 보고 싶었겠는가. 청사 모형 건물은 3층으로 되어 있었다. 임시정부 회의실, 김구 선생 집무실, 집무실, 부엌에 화장실과 침실까지 재현 공간이 강하게 눈에 잡혔다. 김구 주석을 비롯해 상해 임정 요인들의 체취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오매불망(寤寐不忘) 조국 해방을 위해 싸운 독립투사들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우리도 없었을 것이다. 뭍에 붙어 있는 일본의 일부가 되어서 ‘배부른 돼지’로 사는 것에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친일의 잔재가 남아 한민족의 정체성을 흐트러뜨리는 사람들이 있어 안타깝다.

함평 상해임시정부 청사 입구에 붙어있는 표지판

함평군이 임정 요인 김철(1886. 10. 15 ~ 1934. 6. 29)을 기리며 기념관을 설립한 것도 대단한데, 거기에 상해 임시정부 청사까지? 함평과 상해임시정부가 쉽게 연결되지 않았다. 일강 김철 선생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기 전 까지는... . 일강 선생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많은 활동을 한 분이다.

굵직한 것만 기록해 보아도, 몽양 선생과 신한청년당 조직, 손병희 선생 등과 3.1독립운동 거사 도모, 임시정부 수립 참여, 한중호조총사(韓中互助總社) 조직 참여, 백범 선생 등과 의용단 조직, 한국독립당 조직 등을 들 수 있다. 국내외에서 이렇게 광범위한 활동을 한 일강 김철 선생이다. 그럼에도 이해가 어려웠던 것은 많은 임정 요인들이 있고 그들도 출생지가 있을 텐데 왜 함평이어야 하는가?

상해임시정부 청사 모형물이 함평에 세워졌는가 하는 의문은 곧 풀렸다. 상해임시정부 청사는 1932년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로 옮겨야 했다.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임시정부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했다. 임시정부가 항주로 옮기기 전, 그러니까 상해에 있을 때 청사의 명의가 김철로 되어 있었다. 법적 소유자였던 것이다.

김구 여운형 김철 등 임정요인들에 대해 최장원 목사의 설명을 들은 뒤 세 사람이 태극기 앞에서 기념 촬영(좌로부터 최장원 목사, 이상욱 목사, 이명재 목사)

일강 선생은 함평의 천석꾼 김동진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 유학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가정의 튼튼한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가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면서 재산을 처분해서 데리고 있던 종 등 식솔(食率)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일화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이다.

재산이든 사회적 지위든 또는 명예든 움켜쥐고 여분으로 독립운동 한 사람들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상해임시정부 청사 소유권자가 일강 선생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볼 때, 물론 그가 임시정부 초대 재무장(재무부 장관)이었던 이유도 있겠지만, 청사 마련에 그가 재정적으로 많은 부담을 하지 않았나 싶다. 연구의 과제이다.

독립의 공기를 듬뿍 들이켜고 우리는 임시정부 청사를 나왔다. 1세기의 시공을 건너온 것 같았다. 최장원 목사가 우리를 오른쪽으로 해서 건물 뒤편으로 안내했다. 일강 선생 유택이 있고 그 옆에 큰 소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단심송(丹心松)이라고 했다. 일강 선생의 부인이 지조와 정절을 지키려다 목을 매 순절한 나무라고 했다. 독립운동가 가족의 비운(悲運)에 가슴이 아려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의 한 사람이 되어(대한민국 원년 시월 십일일이란 날짜가 보인다. 대한민국 원년은 1919년을 일컫는다.)

김철기념관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역사에 기여한 인물은 거기에 합당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 이데올로기라는 굴레로 또 지역성으로 보이지 않게 홀대를 받은 사람들이 있다. 문화는 전승하는 것이지만 지속적인 발굴이 전제될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한옥 팔작지붕으로 된 기념관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여섯 개의 주제로 일강 김철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차례대로 나열해 보면, 1.김철 선생을 그리며 2.당신은 낮은 곳에 계십니다. 3.신한청년당을 시작으로 4.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일꾼이 되어 5.조국은 당신을 기억합니다 6.윤봉길의사의 거사 결정 등이다.

이 여섯 개를 총괄하는 주제가 '조국은 당신을 기억합니다'가 될 것이다. 그렇다. 독립지사들과 순국선열들이 없었다면 넓게는 나라가 또 좁게는 나 개인도 온전치 못했을 것이다. 이런 생각에 잠시 울컥했다. 일강 선생의 애국정신을 기려 정부는 일찍이 1962년에 그분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김철기념관을 둘러보던 중 김철수 박사(전 함평문화원장)와 구장회 목사(내서교회 원로)를 만나 김철 선생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좌로부터 김철수 박사, 구장회 목사와 사모님, 이명재 목사) .

김철기념관을 둘러보던 중에 반가운 분들을 만났다. 크리스찬문학 발행인인 김철수 박사와 구장회 목사님 내외를 만나서 일강 선생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었다. 구장회 목사님은 교계 문필가로 유명한 분이다. 김철수 박사님이 함평문화원장으로 일할 때 일강 선생의 가려진 부분을 많이 밝혀낸 것으로 알고 있다.

문화가 강조되는 시대이다. 각 지자체별로 문화 전승에 비중을 두고 배전의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지자체의 수준은 경제 등 외화(外華)에 있지 않고 문화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면에서 함평군을 칭찬하고 싶다. 김철을 역사 위에 우뚝 세운 점, 김철을 매개로 상해임시정부 청사 모형을 함평에 건립한 점 등으로 인해서이다.

역사를 모르는 국민에게는 희망이 없다. 역사는 민족의 얼을 포함하고 있다. 역사와 문화는 가시적 결과가 즉각 드러나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높은 건물을 받쳐주는 기반과도 같다고나 할까. 지하에 묻혀 그 모습이 보이지는 않지만 그것 없인 건물이 지탱되지 않는다. 각 지자체들 명심하기 바란다.

김철기념관 관람을 마치고 지사들의 기백을 잇자며 한 팔을 번쩍 들어 각오를 다짐하고 있다

이 글을 쓰면서 김철기념관 관장이 누군지 함평군에 문의했다. 없다고 했다. ‘옥에 티’라고나 할까. 기념관이 있으면 당연히 관장도 있어야 한다. 인품과 명망을 갖춘 분 중에 찾아보면 명예직으로 봉사할 분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이런 분을 모셔서 김철기념관이 명실상부하게 전국에서 부러워하는 모델 기념관, 그래서 관람객들이 끊이지 않는 기념관이 되기를 바란다(계속 이어짐).

이명재 lmj228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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