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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59주년의 날에 - 함께 하지 못한 데서 갖는 부채감

기사승인 2019.04.20  18:3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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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열 교수(전 국사편찬위원장, 숙명여대 명예교수)

이만열 교수(전 국사편찬위원장, 숙명여대 명예교수), 사진 = YONHAP NEWS

오늘은 ‘4.19혁명’ 59주년이 되는 날이자, 교회에서는 대수난일(大受難日)로 지키는 날이다. 다음 주일을 부활주일로 지키는 만큼 오늘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힌 수난의 날로 지킨다. 

하루를 보내면서 찬송가 144장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를 여러번 부르고 또 439장 ‘십자가로 가까이 나를 이끄시고 거기 흘린 보혈로 정케 하옵소서’를 되뇌이면서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숙고하는 시간을 가졌다. 땅 위의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자신의 허물에 대한 죄의식과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 더욱 강렬해지는 것일까. 

오후에 수유리 <국립4.19민주묘지>를 찾았다. 매년 이 날이 오면 새벽이나 오후, 인적이 뜸한 시간에 이곳을 찾곤 했다. 사월학생혁명기념탑에는 “부정과 불의에 항쟁한 수만명 학생 대열은 의기의 힘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바로 세웠고 민주제단에 피를 뿌린 185위의 젊은 혼들은 거룩한 수호신이 되었다. 해마다 4월이 오면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되살아 피어나리라”는 구절로 이 민주묘지를 드러내고 있다. 

오늘 이곳을 찾은 시간에는 강북구와 4.19혁명희생자유족회 등의 후원을 받아 강북문화원이 ‘소귀골음악회’를 열었다. ‘4.19혁명 희생영령을 추모’하기 위한 22번째 모임이란다. 차양모를 쓴 시민들이 무대를 향해 시선을 모으고 있다. 유영봉안소에까지 올라가 방명록에 “그대들 덕분에 우리는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소”라고 쓰고 부끄러움을 숨긴 채 내려왔다. 

4.19 때마다 이곳을 찾는 것은 1960년 그 때 혁명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자괴감 때문이다. 아주 가깝게 지낸 것은 아니지만 같은 대학에 다니던 한 친구가 이곳에 누워있다. 오늘도 그 앞에 서서 부끄러움을 금치 못한다. 

1957년에 대학에 입학한 나는 그 2년 후인 1959년 3월에 군에 입대했다. 군에서 ‘3.15부정선거’를 치렀다. 3월 선거를 앞두고 휴가가 불가능했지만, 선거를 치른 후 3월 말부터는 휴가를 내보내주었다. 

귀대를 하루 앞둔 4월 18일, 서울에 머물면서 라디오를 통해, 고대생들이 종로 4가에까지 진출하여 격렬하게 시위했고 시위도중에 깡패들에 의해 테러를 당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깡패두목 유지광 이정재가 이끌던 조직이라고 했다. 

이 소식은 시민들을 흥분시켰다. 그 이튿날이 귀대날짜여서 새벽에 청량리역에서 춘천행 기차를 타고 6사단 공병부대로 돌아갔다. 라디오는 종일 서울의 시위 소식을 전했다. 

이렇게 4.19혁명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4월이 올 때마다 내 양심을 두들긴다. 일종의 부채의식이다. 의도적으로 회피한 것은 아니지만, 그 때 그 자리에 함께하지 못했다는 자의식이, 흑인영가의 일절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처럼, 못내 마음 한구석을 아프게 한다. 

제대한 후에 동기들로부터 그 날 청와대 앞에까지 진출했었다는 소식을 듣거나, 누군가 총상을 당했었다는 말을 들을 때는 마치 죄의식 비슷한 감정마저 갖기도 했다. 그런 의식은 그 뒤 민주화되어가는 사회를 경험하면서는 무임승차로 민주화에 편승해 있다는 생각에까지 미치게 되어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한다. 나를 괴롭히는 ‘무임승차론’은 그 뒤 이를 많은 사람들에게 확산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화는 분명 4.19혁명 등의 결과라고 한다면, 이 민주화를 계속 지속, 발전시키는 것이 ‘무임승차론’의 자괴감에서 벗어나는 길이며, 앞서간 민주영령들에게도 부끄럽지 않게 보답하는 길일 것이다. 

어제 <사월혁명회> 회원 일동의 명의로 낸 <4월혁명 59주년 선언: 외세를 몰아내고 민족자주통일 이룩하자>는 한겨레신문 광고를 보면서, 최근 전개되는 민족현실에 절망하던 내게 매우 고무적인 심경을 갖도록 했다. ‘사월혁명’의 정신은 사라지지 않고 내연(內燃)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4월을 표방하는 그 수많은 단체들이 ‘4월혁명 정신’과는 담을 쌓고 있는 듯한데, 그래도 시대를 향해 용틀임을 하고 사자후를 토하는 4월의 영웅들이 살아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비록 4월혁명에는 직접 참석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한반도 문제가 뒤얽혀지고 있는 이 때 4월혁명 정신이 시대정신으로 어떻게 표출되어야 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는 내게, 아직도 4월혁명 정신은 건재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강렬하게 주었다. 

오늘날 한국을 향해 거의 사사건건 간섭하고 있는 미국을 향해서 <불평등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폐기하고 주한미군은 전면 철수하라!>, <미국은 4.27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 이행을 간섭 말고 한반도 평화통일에 동참하라!>고 하는 이 같은 일갈이 어디에서 나올 수 있었을까. 그것은 내적으로는 불의와 부정을 척결하고 외적으로는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기약했던 4월혁명의 정신이 기반 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편집부 gcilbo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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