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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욱 박사의 인문학 산책(19) - 자연 질서의 보편성을 따르라 : 『중용』의 경우

기사승인 2019.04.14  19: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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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욱(성산효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철학박사)

이상욱 박사(성산효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Ph. D)

사람의 관계란 멀리하면 서운한 감정을 가진 채 소원해지고 너무 가까이 살다 보면 누구나 가깝게 지내던 친구나 동료가 하루아침에 실망하여 관계가 악화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게 오해든 배신이든 관계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충격은 더 큰 법이다. 그래서 세상을 살면서 적당한 처세로 살아가기란 말은 쉽지만 실천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수요와 공급의 이치도 흔히 하는 말로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딱 알맞은 상태가 바로 적당함이라 할 수 있다.

‘너무 가까이도 하지 말고 너무 멀리도 하지 마라’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이 역시 적당함의 덕목과 상통하는 말이 아닐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적당한 것이 가장 좋은 것으로 보았다. 그는 용기(勇氣)란 무모하지도 않고 겁을 먹지도 않는 상태라 했고, 절제(節制)란 방종도 아니요, 무감각하지도 않은 상태라 했다. 그리고 관대(寬大)함이란 낭비도 인색도 아닌 상태고, 긍지(矜指)란 오만하지도 않고 비굴하지도 않은 것이라고 했다.

인간은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을 철칙으로 삼을 때 비로소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가까워질수록 기대했던 존경과 사랑은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실망을 주거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들이 우리 삶에 얼마나 많았던가? 풍경도 그렇고, 사람의 마음도 그렇고 감동의 마음을 품었던 일 또한 가까이서 보면 멀리서 볼 때와 다른 경우가 많았다.

티베트의 존경 받는 수도승(修道僧) 이었던 ‘아나가리카 고빈다’ 는, ‘산(山)의 위대함은 거리를 두어야 보인다.’ ‘산(山)의 모습은 직접 돌아보아야 알 수 있다고 말하였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지나치게 가까이하여 자신이 그 불꽃에 데이고 사랑이 두려워 너무 멀리 떨어져 얼음처럼 차갑고 외롭게 지내는 어리석은 인생도 또한 많다. 인생 총체적인 숲의 성공을 보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쳐 찌그러진 일생을 보내고야 마는 사람도 너무 많다. 행복을 가져다주는 사람, 불행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행복이 되기도 하고, 불행이 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중용은 중도, 중립, 중간 등의 범주로 이해되어 극단과 대조된다. 중용은 편협하지 않는 까닭에 미덕이 되었다. ‘과유불급(過猶不及)’과 ‘올바른 도’는 모두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는 상태 즉, ‘중용’을 뜻한다. 중용은 군자의 도리로서 극한으로 치닫지 않는 삶의 태도를 가리킨다. 공자는 때와 처지를 가려 가장 적절한 행위를 선택하는 것을 중용의 구체적 실천으로 예시한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사는 것은 정성을 필요로 하는 일이고, 삶에 대한 진지하고 적극적인 성찰에 기반을 둔다. 이는 감각의 과부하와 과도한 경쟁에 던져진 현대인이 실천하기 매우 어려운 삶의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삶이 극단으로 치우치면 우리에게 닥칠 많은 문제를 생각해 본다면, ‘중용’의 미덕은 과거의 화석으로 묻혀서는 안 될 중요한 가치임을 상기하게 된다.

왜 중용인가?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 하며, 성에 따르는 것을 도라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라 한다.” 성(性:心+生)은 타고난(生) 마음(心) 즉, 본성을 말한다. 본성은 모든 생물에 내재되어 있다. 그중 우리 인간의 본성은 무엇일까? 유교에서는 그것은 사단(四端) 즉, 측은지심(惻隱之心 : 仁) 수오지심(羞惡之心 : 義) 사양지심(辭讓之心 : 禮) 시비지심(是非之心 : 智)과 이를 어긋남이 없이 실천하는 것(信)으로 곧 5상(五常) 곧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본성이라 할 수 있다.

이 본성이 우리에게 부여된 천명이며, 그 본성을 찾아가는 길을 `도`라 하고, 그 길을 닦는 것을 `교`라 한다. 인간의 본성(性)을 따르는 길(道)을 밝혀주는 것(敎)이 바로 모든 가르침의 으뜸이 되는 가르침 곧 `종교(宗敎)`이고, 그것을 배우는 것이 '공부(工夫)'인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종교를 신앙으로 잘 못 생각하고 있다. '도'를 닦는다 함은 '사는 길'을 닦는 것이다. 길을 닦는다는 것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이 조화롭게 공생하는 길을 닦음이고, 이는 교육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받는 것이 `생명(生命)`이고, 살면서 해야 할 바가 `사명(使命)`이다. 우리는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생명이 부여된 것이며 그 여정을 `운명(運命)`이라 한다. 우리의 삶이 허무하다고 느끼는 것은 자신의 본성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이 해야 할 바(使命)를 모르고 살다가 죽는다면 그 얼마나 허무한가. 그를 일러 철부지(節不知)라 하겠다.

천명을 따르는 길

『중용』에서 천도(天道)를 ‘하늘의 명령’ 천명(天命)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이 지닌 프로그램대로 이 우주가 굴러가지 명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낳고 관리하는 ‘명령어’는 5가지라고 말한다. ①탄생하라(生) ②성장하라(長) ③열매를 맺어라(收) ④갈무리하라(藏) ⑤성실하라(姓). 이것이 ‘하늘의 명령’이다. 만물은 탄생하고, 자라고, 열매를 맺고, 갈무리되는 과정이다. 이 사이클은 반복된다. 이것이 하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유학은 하늘의 길을 온 우주에 구현하고자 하는 ‘하나님’ 즉 ‘천지신명(天地神明)’ 天命이 우리의 마음에 그대로 들어와 있다고 주장한다. 대우주의 경영자인 하나님과 소우주의 경영자인 인간의 마음이

둘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천인합일(天人合一), 즉 ‘하늘과 사람은 하나이다’라고 한다.

우리나라 동학에서 ‘사람이 한울님이다!’라고 주장한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마음’은 우리의 이기적 ‘욕심’이 아니라 하늘과 통하는 마음의 ‘양심’을 말한다. 맹자는 이러한 전지, 전능한 마음, 양심을 특별하게 ‘양지(良知), 양능(良能)이라 불렀다. 양지와 양능을 ’양심‘의 2가지의 항목이 되었다. 양지(良知)는 양심이 본래 갖춘 ’지혜‘이며 양능(良能)은 양심이 본래 갖춘 ’능력‘이다. 우리 양심은 배우지 않아도 인간의 마땅한 도리를 알고, 인간의 도리를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과 인간이 둘이 아니고 하나이기 때문이다.

유교는 ’양심‘에는 누구나 이 선천적인 프로그램이 깔렸다고 전제한다. 그래서 배우지 않아도 ①불쌍한 마음을 보면 측은지심이 발현하고, ②사람을 보면 자신을 낮추어 남과 조화를 이루려는 사양지심을 발현하고, ③잘못을 보면 공분이 여기는 마음이 있어 수오지심을 발현하고, ④옳고 그름을 자명하게 구분하여 시비시심을 발현한다. ⑤이 4가지 양심의 발동은 언제나 한결같아 성실 지심을 발현한다. 이 중에서 ①-③은 양심이 본래 갖춘 ‘양능’을 이루며, ④는 양심이 본래 갖춘 지혜인 ‘양지’를 이룬다.

행복한 인간에 이르는 길

 중용의 근원을 자연 질서의 조화에서 찾듯 인간 보편적인 정의에 따라 중용을 이해해야 한다. 『중용』은 윤리적 삶이 가장 압축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주석자 가운데 누구보다도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이 구절을 『중용』의 근본 취지에 맞게끔 탁월하게 풀이했다. 보편적인 것에 초점을 두면 특수한 것에 어두울 수 있다. 그래서 정밀한 것을 강조했다. 초월적인 것에 치중하면 고원하여 중도를 잃어버릴 수 있다. 그래서 중용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정약용은 중용을 산술적 중간이 아니라 A를 반대되는 B와 공존시켜서 균형을 유지하도록 하는 방식, 즉 'A이면서도 B' 형식으로 제시한다. 사고나 행위의 병리 현상을 치유하기 위해서 모순마저 끌어안을 수 있는 개방적 사유를 보여 준다.

공자는 개인의 차원에서 중용을 말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 차원에서 중용을 중요시했다. 공자는 절제의 미덕을 중용에서 말한다. 군자는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 절제란, 주어진 충동과 욕망을 좀 더 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적절하게 조정하는 것을 뜻한다. “사람이 아니면 참지 않고, 참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라는 옛사람들의 가르침을 본받아, 자기의 감정을 억누르고 분함과 어려움 등을 스스로 참을 수 있어야 한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중용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임을 밝힌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B.C 322)는 현실 속에서 참다운 존재를 찾고자 하였다. 그에 따르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어떤 목적이 있는데,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이다. 그리고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덕을 쌓아야 한다. 그런데 ‘덕’은 우리에게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실천과 노력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덕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좋은 행동이 몸에 배도록 끊임없이 습관화하는 것과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용(中庸)의 생활 자세를 강조하였다.

유교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가 말한 중용(中庸)의 덕도 감정을 절제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인간이 걸어야 할 길은 결국 우주의 조화를 이루되, 매 순간 올바른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에 불과하다. 옛말에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라” 경천애인(敬天愛人)이고 하였다. 사실 이 말에 인간의 길이 온전히 갖춰져 있다. 이러한 ‘경천애인’의 가르침은 예수님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30-310)”과 바울의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하라 하신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갈 5:14)” 가르침과 상통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중심’만 확립이 되면 아무리 희로애락을 일으켜도 균형을 잃어버리는 법이 없을 것이다. 슬픔이 찾아오건, 분노가 찾아오건, 인간의 길인 사랑, 정의, 예절, 지혜, 성실에 따라 대처하게 된다. ‘중심’만 확고하다면 균형을 잃은 감정들은 절로 ‘조화’를 찾게 될 것이다. 양심의 선하고 밝은 불꽃은 욕심의 악하고 어두운 냉기를 말끔히 정화해 줄 것이다. 희로애락의 조화로운 경영은 무엇보다 우리 마음의 ‘중심 잡기’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양시(兩是) 양비(兩非)를 극복하는 길

중용이라는 보편적인 정의를 고려하지 않은 채 기계적인 중간을 중용으로 이해하는 것은 중용에 대한 오독이다. '중용에 따른 삶'이라고 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쉽게 양시론(兩是論)과 양비론(兩非論)을 떠올릴 것이다. 중용이 양극단의 중간, 즉 중도를 나타낸다면, 그것이 어느 한쪽을 편들지 않는 양시나 양비와 같은 것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양비론은 근래 특정 언론이 정부의 정책 집행과 사회 현상을 보도하면서 둘 다 틀렸다는 식의 평가하는 행태와 관련이 있다. 예컨대, 노동자들이 파업하고 정부가 미온적으로 대처를 하면 언론은 노동자의 파업도 잘못이고 정부의 대처도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정작 노동자들이 왜 파업을 벌이는지에 대한 논의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론의 영역과 달리 현실은 가변성과 우연성이 끼어들 수 있으므로 무엇이 절대적으로 옳다거나 그르다고 판정을 내리기 모호한 영역이 있다. 이럴 때 논의에 참여하는 당사자들이 나름대로 주장할 만한 근거가 있다. 이런 점에서 양비론과 양시론이 현실의 갈등 상황을 해결할 유력한 방안으로 고려될 수 있다. 또 중용이 방법론적 다원주의 특성을 보이므로, 중용과 양시나 양비의 거리가 그렇게 멀어 보이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중용과 양시나 양비 사이에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큰 차이가 있다. 중용에서 중은 이론과 실천의 두 계기에 걸쳐 있다. 이론적 계기는 사람이 해서 안 되는 것과 꼭 해야 하는 것은 경계,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결정하는 기준, 만물의 생명이 시작되고 끊임없이 재생될 수 있는 근원 등과 관련된다.

『중용』의 지은이는 경계는 인간다운 관계와 도리, 기준은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공정성과 중심성, 근원은 일시적인 거짓이 아닌 영원히 지속하는 진실이라 제시한다. 따라서 도리에 어긋나고 공정성을 어기며 진실이 아닌 것은 양시나 양비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하나가 옳으면 하나가 틀린, 즉 일시(一是) 아니면 일비(一非)가 성립된다.

『중용』에서 내세우는 사람의 관계성과 중심성, 그리고 진실한 지속이 현실에 적용되어 실천될 때, 그 방법은 하나일 수도 있고 둘 이상일 수도 있다. 여기서는 옳고 그름의 문제보다도 적절한지 부적절한지가 문제가 된다.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효도한다고 할 때 공통적인 것도 있지만 사람마다 달라서 '반드시' 어떻게 해야 한다고 규정하기 어려운 것이 많다. 예컨대 부모님이 회갑을 맞았을 때, 좋은 음식을 대접할 수도 있고 물건을 사 드릴 수도 있고 여행을 보내드릴 수도 있다. 즉,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길이 있다. 여기서 어느 한 가지를 선택한다고 해서 그것이 결코 맞느냐 틀리냐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중용이 방법론적 다원주의가 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양시나 양비와 명백하게 다름을 알 수 있다. 즉, 중용에 따른 삶은 양시론과 양비론이 절충주의로 귀결되는 것과 다르다. 오히려 그것은 융통성 있는 원칙주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중용에 따라 사는 사람은 기준과 원칙을 확고하게 지키면서 현실의 특수한 사정을 세심하게 고려할 수 있다.

『중용』의 지은이는 극단의 시대가 건설을 위한 파괴가 아니라 파괴 속에서만 존재 의의를 찾는 파괴 지상주의로 귀결되리라는 것을 예견했다. 『중용』의 저자는 파괴와 일방주의 쪽으로 치우친 시대의 좌표를 평화와 도리 쪽으로 되돌리고자 했다. 이런 맥락에서 중용에 따른 삶이란 사람의 사고와 행동이 극단주의로 진행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균형적 사고, 실천적 지혜, 습성화된 행동이 결합한 윤리적 삶을 가리킨다.

성서에서 말하는 중용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 7:16-18]

성경이 말하는 중용은 그리스 철학이나 유교에서 말하는 중용과 어떻게 다른가? 성경에서 말하는 중용은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길에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는 참 생명의 길이 오직 하나 곧 하나님의 길이라는 신본주의적 사고에서 나온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지나친 의인’과 ‘지나친 악인’이 빠지기 쉬운 극단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나야 한다. 대개의 극단주의는 감정의 산물이며,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정해 주신 삶의 조건들을 혼잡하게 만드는 결함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지혜를 얻어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3-24)

이상욱 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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