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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욱 박사의 인문학 산책(11) - 근대인간 파우스트의 허망한 꿈

기사승인 2019.02.15  12:5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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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욱 교수(성산효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철학박사)

이상욱 박사(성산효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철학박사)

시대적 배경과 문예사조

나폴레옹이 독일에서 괴테를 만났을 때의 일이다. “나를 위하여 시 한 편을 지어 줄 수 없겠는가?” 나폴레옹이 이렇게 청하자 괴테가 대답했다. “폐하, 저는 어느 사람에게도 시를 써서 바치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아니, 이유가 무엇인가?” 나폴레옹이 되묻자 괴테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단지, 나중에 후회할 일은 하지 않는다는 제 신조 때문입니다.”

괴테의 대표작인 희곡 『파우스트』는 구상에서 완성에 이르기까지 무려 60년이 걸린 대작이다. 대학 졸업 직후부터 쓰기 시작했지만 결국 미완성 상태로 간행된 『파우스트 단편』(1790)을 읽은 실러(1759~1805)가 감탄하여 완성을 독려하자, 괴테는 1797년에 가서야 다시 집필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11년 뒤인 1808년에 『파우스트』 제1부가 간행되었지만, 이 일을 누구보다 기뻐했을 실러는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애초에 구상했던 제2부의 집필은 그로부터 또다시 한참이 지난 1825년에 시작되었고, 6년 뒤인 1831년, 괴테가 사망하기 바로 전(前) 해에 끝났다.

괴테가 살았던 18C 중반에서 19C 중반까지 유럽은 여러 문예사조의 충돌이 있었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의 물결이 일고 있었고, 괴테의 조국 독일의 통일, 즉 비스마르크의 도이치제국이 있었던 시기였다. 특히 18C 말의 1789년 ‘프랑스 혁명’은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걸쳐 유럽 전역에 퍼진 계몽사상이 아래로부터의 사회 변혁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는 시민 계급 해방 사상으로 이룩된 결과였다.

『파우스트』 작품의 소재가 된 파우스트 전설은 16~17세기경부터 독일에 전해져 오던 마술사의 이야기로서 민중본과 인형극 등으로 널리 민중들에게 친숙해져 있었다. 전설상의 파우스트는 지식의 힘으로 지상의 향락을 제멋대로 추구하려는 르네상스 시대의 인간이다. 중세적인 신앙에 의하면 이러한 욕망을 일으키는 자체가 죄악이기 때문에 전설상의 파우스트는 지옥에 떨어진다.

Goethe's Faust:괴테의 파우스트, 1918, Richard Roland Holst(1868-1938)

파우스트는 단순히 희곡에 등장하는 인물만이 아니다. 근대 인간을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주제는 한 인간의 생애가 아니다. 인간 존재는 무엇이며 그 목적이 어디 있느냐를 다루고 있다. 괴테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파우스트는 인간성 일반에 대한 해석이며, 동시에 자연과 신에 대한 그의 견해이다. 괴테는 파우스트를 통해서 그의 청년기에서 죽을 때까지의 모든 경험과 시대와 더불어 변화한 그 당시의 모든 문화 사상을 예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파우스트』는 독일어로 쓰인 가장 중요한 문학작품 중 하나이다. 독일 교양 자산의 핵심이자 어떤 경우에도 쓰일 수 있는 인용의 보고이다. 「파우스트」는 희곡이다. 그러나 방대한 분량 때문에 무대 상연을 위한 희곡이 아니라 ‘읽기 위한 희곡’(Lesedrama)이라고 한다. 패러디의 대상이기도 하고, 연극으로 연출되며, 음악으로 작곡되고, 희극으로 각색되는 등 항상 새로이 연구된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파우스트』를 오페라로 만들려고 구상했지만 끝내 그의 죽음으로 무산되었고, 구스타프 말러는 말러 교향곡 제8번 E♭장조 천인의 교향곡에서 파우스트의 제2부를 가사로 채용하고 있다. 프란츠 리스트는 파우스트를 주제로 아예 교향곡을 하나 만들었다. 또한, 그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를 주제로 한 왈츠도 4곡 작곡했다. 렘브란트, 들라크루아 등이 파우스트의 한 장면을 그린 회화도 있다.

파우스트의 비극

「파우스트 비극」은 내용상 1부를 ‘학자 비극’과 ‘그레트헨 비극’, 2부를 ‘헬레네 비극’과 ‘통치자 비극’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부는 「천상의 서곡」으로 시작한다. 주님이 메피스토펠레스에게 파우스트를 아느냐 묻고, 이어 둘은 파우스트가 신의 뜻에 충실할 것인가 아닌가에 대해 내기를 한다. 주님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그의 영혼을 타고난 근원에서 벗어나게 해보라. 그리고 그것을 네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데려가라. 너와 함께 지옥으로.”라고 장담한다. 이 장면은 구약성서 『욥기』에 나오는 장면 그대로이다. 주님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착한 인간은 비록 어두운 충동 속에서도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잘 알고 있더군요,’라고 말하게 될 것이라며 악마가 제안한 내기에 응하게 된다.

한편 지상 세계의 파우스트는 50여 세의 노교수로서 철학, 법학, 의학, 신학까지 모두 섭렵한 박사이며 학자이지만, 이렇듯 모든 학문을 탐구해도 자신이 신과는 대등한 존재가 되지 못함을 한탄하며 세속적 쾌락(명성과 지식)과 숭고한 선인들의 영역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존재이다.

Faust und Mephisto:파우스트와 메피스토

이때, 주님과 내기를 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의 앞에 나타나 조건을 제시하고 계약할 것을 권한다. 이 계약은 메피스토(Mephisto)가 파우스트의 종복이 되어 넓은 세계를 두루 보여 주고 온갖 환락을 다 맛보게 해 주지만, 파우스트가 그것에 만족하여 "어느 순간을 향해 멈추어라! 너는 정말 아름답도다"하고 소리치면, 죽어서 그의 혼을 악마에게 내어 준다는 것이다.

세계의 생성 원리를 모르는 악마는 관능적인 쾌락이면 충분하리라 믿었지만, 파우스트가 바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파우스트가 바라는 것은 악마의 신출귀몰한 재주를 이용하여 넓은 세계를 직접 체험해 보고, 학문으로 얻지 못했던 인간과 우주의 궁극적인 진리를 발견하자는 데에 있었다.

계약을 끝낸 메피스토는 파우스트를 라이프치히의 아우엘바흐 지하 술집으로 데리고 갔다. 술로 그를 도취시키려고 하였으나 실패한다. 파우스트는 인생을 향락하기에는 너무 늙었다. 쾌락을 맛보여 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젊음이 필요했다. 그래서 악마는 그를 마녀의 주방으로 데리고 가 마약을 먹여 20대 청년으로 탈바꿈시킨다. 청년이 된 파우스트는 청순하고 성실한 그레트헨이라는 여성을 만난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그는 정욕의 불길을 억누를 수가 없었으나, 그의 감정은 메피스토의 기대와는 달리 점차 진실한 사랑으로 승화된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가 진실한 사랑으로 승화되는 장면을 보고 개입하게 된다.

파우스트는 그레트헨을 유혹하여 사랑을 나누기 위해 어머니에게 다량의 수면제를 먹이게 한다. 그런데 어머니는 영영 깨어나지 못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안 그레트헨의 오빠 발렌틴이 파우스트와 결투를 벌인다. 메피스토펠레스의 도움으로 파우스트는 그를 찔러 죽인다. 이후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를 마녀들의 축제인 발푸르기스의 밤에 데려갔을 때, 그레트헨은 파우스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물에 빠뜨려 죽이게 된다. 그녀는 실성하게 되고 영아살해범으로 잡혀 결국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한때의 욕정에 눈이 멀어 어머니와 아이까지 죽인 그레트헨은 사형판결을 받고 감옥에 갇힌다. 파우스트는 메피스토의 힘을 빌려 그녀를 구출하기 위해 감옥으로 찾아간다. 그녀는 함께 달아나자는 파우스트의 요청은 거절한다. 그러자 그레트헨은 “하나님의 심판을! 저는 하나님께 몸을 맡겼나이다.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여! 천사여, 신성한 무리여 나를 에워싸고 지켜주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할 때, 메피스토펠레스는 “저 여자는 심판받았다!”라고 당당하게 승리를 외친다. 그때 하늘에서 “구원받았느니라!”라는 목소리가 들리면서 1부가 끝이 난다.

Faust und Mephisto im Kerker:감옥에서 파우스트와 메피스토(Joseph Fay, 1825-1875)

막의 구분 없이 장면으로 이어지는 1부에서는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개인적 사건을 다루었지만 2부에서는 전쟁과 간척사업과 같은 사회적 사건들을 다룬다. 변하지 않은 것은 오직 인물의 성격뿐이다. 제2부의 이야기는 꽃이 만발한 어느 아름다운 잔디밭에서 파우스트가 누워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레트헨의 비극에 대한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요정들로 상징되는 자연의 치유력에 의한 심신의 회복이 필요했다. 죄의 하중에 눌려 알프스의 초원에서 잠들었던 파우스트는 잠에서 깨어나자 가벼운 마음으로 대 세계를 향해 새로운 출발을 한다.

1막에서 파우스트는 어느 봉건제국 황제의 궁정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그는 재정난을 해결해주는 활약을 펼치며 막강한 권력과 재산을 소유하게 된다. 우연히 트로이 전쟁의 발단이 된 고대 그리스의 전설적 미녀 헬레네의 환영을 보게 된 파우스트는 고전적인 미의 상징인 헬레네를 소유하고자 갈망한다.

2막에서 헬레네를 저승에서 데려온 파우스트는 3막에서 중세의 영주로 등장하여 고대의 미녀 헬레네와 결혼한다. 파우스트와 헬레나는 잠깐 은둔 생활을 즐기며 행복한 생활을 보내지만,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오이포리온은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세상을 보며 인간들과 함께 근심과 고통을 나누려고 날개를 펴고 날아가다 빛을 발하며 땅으로 떨어진다. “어두운 나라에, 어머니, 나만 홀로 내버려 두지 마세요!”라는 아들의 마지막 말에 헬레나는 “행복과 아름다움은 오래가지 못한다.”라는 이별의 말을 파우스트에게 남기고 다시 하계(下界)로 돌아간다. 이때 파우스트에게는 그녀의 껍질 겉옷만이 쥐어져 있게 된다.

4막에서 파우스트는 다시 황제를 도와 반란군을 진압하고 그 공로로 해안의 넓은 땅을 봉토로 하사받는다. 이제 군주가 된 파우스트는 5막에서 더 많은 백성에게 더 많은 농경지를 제공하겠다는 포부를 갖고서 대규모의 간척사업을 벌인다. 이제 파우스트는 자신의 쾌락이 아니라 인류의 유익을 위해 살기로 작정하고 대규모의 간척사업에 돌입한다. 이 과정에서 눈이 멀게 된 파우스트는 메피스토가 자신의 무덤을 파는 소리를 간척사업이 완성된 것으로 착각하고 지상낙원을 상상하며 “멈추어라”라고 외친다. 그러자 파우스트는 죽고 계약에 따라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의 영혼을 차지하려 하지만 천사들이 나타나 파우스트를 하늘로 인도한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파우스트는 제1부에서 자신이 저지른 죄를 완전히 망각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파우스트는 권력과 정치, 미와 예술에 대한 추구에서도 모두 허망함을 느끼고 마침내 인류를 위한 창조 행위에 매달린다. 그러나 그는 그 과정에서 간척사업에 걸림돌이 되는 노부부를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부탁하여 오두막과 부근의 교회를 불태워 부부를 죽게 만드는 등 ‘대의’를 위해 무자비한 폭력도 서슴지 않는다. 파우스트는 이미 백 살 정도로 늙었지만, 그의 가슴은 오직 간척지를 개척해 거대한 새로운 영지를 건설하려는 야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파우스트는 마침내 자신의 원대한 이상을 이루었다고 믿는 모습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 보기에 좋았다는 말이 생각나게 한다. 하지만, 그것은 근대적 발전론에 ‘눈이 먼’ 파우스트의 착각일 뿐이라는 것을 독자들은 안다. 결국, 파우스트는 죽고 인간 파우스트의 삶은 비극으로 끝난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늘날 개발을 통해 더 많은 부를 창출하겠다는 논리로 기존에 살던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내쫓고 심지어 죽음으로 몰아가는 행위가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모습을 익숙하게 떠올릴 수 있다.

18세기 영화의 주제에서도 많이 나타난 파우스트, John Ashton(1834)

그러나 「한밤중」에, 인간의 마음을 절망으로 몰아넣는 네 명의 “잿빛 여인”들이 파우스트의 궁전으로 찾아온다. 첫째는 결핍이고, 둘째는 죄악이며, 셋째는 근심이고, 넷째는 곤궁이다. 파우스트는 전쟁에서의 승리와 거대한 땅의 개척과 같은 빛나는 사업을 달성했지만 착한 노부부 바우치스와 필레몬을 비참한 죽음으로 몰아넣은 데에서 오는 죄의식이 그의 양심에 생겨났다. 그것을 틈타 네 가지의 어두운 힘이 숨어들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천사들이 나타나 파우스트의 영혼을 하늘로 데려간다. 파우스트는 누구인가? 순진한 여성을 유혹한 뒤 버려 죽게 했다. 선량한 노부부마저 죽이는 등 수많은 사람을 불행으로 몰아넣고서도 자신의 잘못에 대해 한 번도 반성하지 않는다. 끝까지 자신의 죄에 대해 속죄하지도 않은 파우스트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 왜 괴테는 파우스트를 구원받는 것으로 그렸을까?

이에 대한 답은 비극이 시작되기 전에 붙어있는 <천상의 서곡>에서 짐작해볼 수 있다. 즉 주님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파우스트를 유혹해도 좋다고 허락하면서 인간은 노력하는 동안 방황하게 마련이지만 어두운 충동 속에서도 올바른 길을 찾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주님은 끊임없이 열망하며 노력하는 인간은 그 과정에서 잘못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이자 운명임을 처음부터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파우스트가 곧바로 구원되는 것은 아니다. 천상에서 파우스트의 죄를 대신 속죄하는 그레트헨의 기도와 ‘영원히 여성적인 것’을 통해 비로소 파우스트는 구원받게 된다.

근대 인간 파우스트의 허망한 꿈

작품에서 파우스트가 보여 주는 것은 초인적인 인물상이다. 이른바 '파우스트적 인간상' 근대 인간이다. 파우스트는 죽음을 앞두고는 갑자기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과 더불어 살고 싶다.”라고 외치기 때문에, 그가 마치 자유와 평등이 넘치는 계몽주의적 민주사회를 꿈꾼 것같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파우스트의 꿈은 처음부터 실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런 근대 인간은 이런 꿈을 실현하게 할 만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파우스트는 당시 최고의 지식인이었지만 이성보다는 욕망, 도덕보다는 쾌락을 좇아 그야말로 “폭풍같이” 살았다. 그런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파우스트는 근대 인간을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주제는 한 인간의 생애가 아니다. 인간 존재는 무엇이며 그 목적이 어디 있느냐를 다루고 있다. 그가 인식한 근대 인간은 어떤 모습인가?

파우스트가 애초에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한 것도 어떤 사회적 이상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단지 개인적 욕망과 쾌락을 성취하기 위함이다. 실제로 그는 민중을 경멸하고, 독재적이며, 이기적이다. 예를 들어, “나는 몇 백만 명의 백성을 위해 토지를 개척”하였다고 외치지만, 토지는 여전히 그의 소유이고, 일꾼들은 강제로 징발된다. 당연히 간척사업에는 노인 바치우스의 비난대로 “제물의 피도 틀림없이 흘렸을 것”이고 “밤중에는 고통스러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파우스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봉건 군주나 자본주의 엘리트 기업가처럼 자기만족에 넘쳐 “쟁기와 괭이를 써라. 지시한 것을 곧 해치워라. (…) 최대의 사업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수천의 손을 부리는 하나의 정신으로 충분하리라.”라고 외친다. 그는 계몽주의적 민주사회를 위해 노력하거나 애썼던 인물이 아니라 탐욕적인 괴물이다.

그는 학문을 위해 평생을 다 보낸 어느 날에야, 자기 안에서 외치는 진정한 내면에서 악마의 소리를 들었다. 그 다음에는 오직 그것의 실현을 위해 모든 일을 다 했을 뿐이다.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고,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지하세계에 내려가는 것조차 망설이지 않는 전형적인 근대 자본주의 인간이다. 그 누구도 그를 말릴 수 없었고, 그 무엇도 그를 멈추게 할 수 없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무엇 때문에 영원 속에서 헤맬 필요가 있을까! 자기가 인식하는 모든 것은 다 이룰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지상의 날들을 보내라.”라고 외치며 오직 자기실현을 위해서만 최선을 다했다.

그렇다면 “누구든 줄곧 노력하며 애쓰는 이를 우리는 구원할 수 있습니다.”라는 시구 속에 파우스트의 구원에 대한 열쇠가 숨겨져 있다. 누구든 자기실현을 위해 줄곧 노력하며 애쓰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알고 보면, 바로 이것이 독일 낭만주의의 궁극적 이상이자 긍정적 목표였다. 낭만주의자들에게 있어 자기실현이란 단순한 자아의 완성이 아니라 신적인 것을 닮아가는 초인적인 것이며 진리의 구현이자 구원의 길이었다.

여기에서 파우스트는 구원자가 아니라 구원받아야 할 인간 근대 인간임을 볼 수 있다. 이때 말하는 자기실현에는 그레트헨이나 헬레나를 소유하려는 개인적 욕망 뿐 만 아니라 전쟁에서의 승리, 간척사업과 같은 사회적 욕망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자기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실현하는 일, 오직 이 목표 하나만을 바라보고 근대 인간 파우스트는 수많은 죄악과 슬픔 그리고 절망을 견디면서 “다시 희망을 품고 폭풍같이” 자기를 실현을 위해서 일생을 헤쳐 나가는 고독한 인간일 뿐이다.

인류에게는 두 가지의 이루지 못한 꿈이 있었다. 동양의 불로장생 술과 서양의 연금술이다. 불로초를 구하는 것은 중국에서 진시황 이래 모든 황제의 꿈이었지만 황제들의 수명만 단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서양에서는 중세 이래 어떤 물질이라도 황금이나 다른 금속으로 바꿀 수 있다는 현자의 돌을 만드는 것이 연금술사들의 꿈이었다. 불로장생술이나 연금술은 자연법칙에 어긋나 불가능한 것으로 밝혀졌지만 동양의 한의학이나 서양의 화학 발달에 이바지하였다.

"서구의 몰락"(The Decline of the West), Oswald Spengler

슈펭글러는 『서구의 몰락』에서 무한을 동경하고 미지를 찾아 헤매는 열정은 모든 인류에게 공통된 것이 아니라 중세 이래 유럽인의 특유한 심성이라고 보았다. 슈펭글러는 이 문화를 파우스트적 문화라고 명명하였다. 현대의 서구 기계문명은 무한한 진보와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는 파우스트적 문화의 소산이지 모든 인류에게 공통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슈펭글러는 서구의 파우스트적 문화가 21세기에는 가능성을 소진하고 몰락하여 화석화한 문명으로 남는다고 예언한다. 문화가 문명으로 바뀌고 하나의 거대도시가 국가 내의 다른 지역을 모두 '시골'로 만든다.

그 결과로 출산율이 저하되어 인구가 줄기 시작한다. 생산의 뒷받침 없는 화폐 금융이 지배권을 장악한다. 이것이 문명이 몰락하기 시작하는 징표라는 것이다. 슈펭글러의 저서가 아직도 생명력을 가지는 것은 그의 예언이 현대 서구사회에서 현실화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위만 보고 가는 문화가 아니라 옆도 살피는 문화가 필요하다. 성장은 인간의 행복과 국민의 통합에 기여해야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유럽 중세의 전설적 연금술사 파우스트를 극화한 괴테의 대작 '파우스트'는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린다'라는 구절로 끝맺는다.

인간은 아무리 오래 산다 해도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리고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과 더불어 살고 싶다.” 인간의 유토피아는 스스로 성취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파우스트적 욕구, 즉 종교적 욕구를 가진 존재이다. 즉, 유한한 삶에서 벗어나 영원한 삶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구약성서 전도서 기자는 파우스트적인 인간들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도서 3:9-11).

이상욱 gcilbo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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