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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욱 박사의 인문학 산책(3) - 행복이란 무엇인가?

기사승인 2018.12.07  13:3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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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욱(성산효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철학박사)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무엇인가? E. H. 카(1892년 런던출생~1982년)의 유명한 문장이 말하는 것처럼 역사란 “현재의 눈을 통해서야 비로소 그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인간의 모든 것은 사라진다. 우리 삶은 단 한 번뿐이다. 우리는 한 번의 예행연습도 없이 세상이라는 무대에 섰다가는 퇴장해야만 하는 존재다.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 1929년4월1일~ )가 썼듯이, “한 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인생이란 하나의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그 인생은 아무런 무게도 없고 처음부터 죽은 것이나 다름없어서, 인간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게 살아보려고 해도 그 잔혹과 아름다움이란 무의미하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역사는 사라진 것에 대한 기록이다. 사라진다는 것은 무(無)이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역사란 무(無)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다. 스스로가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아는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다. 그 자신의 삶이란 의미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 의미가 있었음을 입증해야 했고, 이런 필요가 『역사』라는 서사를 만들어냈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의 지성(知性)을 이야기할 때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B.C. 384~322)를 떠올리지만, 사실 호메로스 이후에 나타난 첫 번째 그리스의 지성은 소크라테스보다 15년 정도 먼저 태어난 역사가 헤로도토스다. 그는 『역사』라 는 책을 통해 세계 최초의 ‘역사가 Historian’으로 등극하게 된다. ‘역사(historia)’라는 단어와 개념도 사실 그가 처음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의 서문에서 저술 목적을 분명히 했다.
 
"이 글은 할리카르나소스 출신 헤로도토스가 제출하는 탐사 보고서이다. 그 목적은 인간들의 행적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망각되고 그리스인들과 비 그리스인들의 위대하고도 놀라운 업적들이 사라지는 것을 막고 무엇보다도 서로 전쟁을 하게 된 원인을 밝히는 데 있다."
 
헤로도토스는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에 의해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다. 그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 특히 국가와 국가 간의 전쟁이 신의 섭리나 계획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는 패러다임을 깨뜨린 사람이다. 그는 역사를 신화의 세계에서 분리했고,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관해 탐사하고 그 전후 과정과 결과를 기록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는 합리적으로 ‘역사를 기술하는 방식 Historiography’에 대해 처음으로 고민한 사람으로 역사적 사건의 발생 원인과 그 사건이 남긴 역사적 의미에 대해 ‘탐사’를 시도한 최초의 인물이다.

헤로도토스의 <역사>, 천병희 역, 도서출판 숲

역사(Historia), 최초의 탐사 보고서

헤로도토스는 역사의 아버지로 불린다. 역사란 시대의 증인이고, 진리의 빛이며, 기억에 되살림이고, 삶의 스승이며, 옛 세계의 소식 전달자라고 정의를 내린 키케로가 처음 그렇게 불렀다. 헤로도토스는 그리스인과 이방인의 위대한 업적들을 기록해 둠으로써 과거의 기억을 보전하고자 했다. 특히 페르시아와 그리스, 양대 세력이 왜 서로 전쟁하기에 이르렀는지 그 이유를 밝히기 위해 ‘진실을 묻고 찾아 추적하는 탐구자’로서 ‘탐구’라는 뜻의 『역사(Historia)』를 썼다.

그는 들은 그대로 기록하고, 전해지는 것을 그대로 전하는 것을 서술 원칙으로 삼았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이 세상이라고 알고 있는 모든 곳을 찾아다녔다. 여행하였다는 것은 그의 저서 『역사』 9권에서 알 수 있지만, 그것이 언제 있었던 일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여행 범위는 북으로 스키타이, 동으로는 유프라테스를 내려가서 바빌론까지, 남으로는 이집트의 엘레판티네, 서로는 이탈리아, 그리고 아프리카의 키레네까지였다. 아프리카인, 카르타고인, 키프로스인, 이집트인, 이탈리아인, 팔레스타인인, 스키타이인 등을 직접 만나 나눈 대화 내용이 『역사』의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그는 페르시아 제국, 이집트, 그리스 및 이탈리아 등지를 널리 여행하면서 여러 민족에 대한 흥미로운 자료들을 풍부하게 수집했다. 그리스와 페르시아 사이의 대전 - 페르시아 전쟁 - 에 관한 그의 유명한 서술은 배경 설명이 어찌나 풍부한지, 그의 저작은 실로 세계사를 방불케 할 정도이다. 헤로도토스는 그 전쟁을 동양과 서양 사이에 벌어진 하나의 영웅적 투쟁으로 간주했다. 이 전쟁에서 제우스는 야만족의 대군에 대항한 그리스인에게 승리를 안겨다 주었다.

『역사』는 전부 9권으로 되어 있지만, 이는 헤로도토스 본인이 구분한 것이 아니라 후대의 알렉산드리아 학자들이 편의적으로 나눈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헤로도토스 자신이 9개의 파피루스 두루마리로 된 『역사』를 청중 앞에서 직접 낭독했다는 카그나치의 주장이 있다. 그에 의하면 『역사』 9권은 각각 3개(제5권은 4개)의 낭독 단위로 나뉘어 전부 28개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 각각은 대략 4시간에 걸쳐 청중들에게 낭독되었다는 것이다.

내용을 보면 1권에서 6권까지는 페르시아 제국의 성장을 다루고 있다. 최초의 아시아 군주인 리디아의 크로이소스가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정복하는 것에서 시작해 마라톤 전투(19강)에서 페르시아인들이 패퇴하는 것으로 끝난다. 다음 7~9권은 10년 후 마라톤 패배를 복수하고 그리스를 페르시아 제국에 흡수하려는 크세르크세스 왕의 기도를 묘사한다. <역사>는 페르모필레 전투(22강), 살라미스해전(24강)을 거쳐 플리타이아이 전투에서 페르시아의 패퇴(26강), 아테네 제국이 수립되는 제28강으로 끝난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헤로도토스는 『역사』의 도입을 페르시아와 그리스 간에 벌어진 기원전 5세기의 전쟁에 대한 기록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그는 ‘헬라스인들에게 맨 처음으로 적대 행위를 시작한 한 남자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는 짧은 문장을 제시한다(제1권 5장). 그의 의도는 무엇인가? 크로이소스는 헬라스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페르시아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페르시아에 의해 오래전에 정복당한 리디아의 왕이며, 기원전 6세기의 인물이다.

그는 페르시아 전쟁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크로이소스를 소개하면서 “인간의 행복이란 덧없는 것임을 알기에 나는 큰 도시와 작은 도시의 운명을 똑같이 언급하려는 것이다”라고 밝힌다(제1권 5장). 이 짧은 문장이야말로 이 방대한 책의 간단명료한 요약이라고 할 수 있다.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가 추구했던 행복과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가 추구했던 행복을 비교하고 있다. 작은 나라 리디아의 왕이나 큰 나라 페르시아의 왕은 “인간의 행복이란 덧없는 것”임을 알지 못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헤로도토스는 이 부자의 나라 행복한 왕의 나라에 찾아온 그리스의 현자 솔론의 이야기로 『역사』의 첫 장면을 풀어간다.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는 사실 스스로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자처할 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큰 나라를 다스리는 권력, 막강한 군대를 거느렸고, 엄청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솔론은 옛 그리스 7현인 중의 한 사람으로, 아테네의 입법 개혁자로 대의 민주주의의 기초를 놓은 인물로 자신이 공들여 만들어 놓은 법을 아테네 사람들이 쉽게 개정하지 못하도록 10년 예정의 외국 여행길에 있었다. 그는 먼저 이집트를 둘러본 후 동방으로 걸음을 옮겨 리디아의 수도 사르디스를 방문했다.

솔론, BC 638~BC 558년. 고전기 그리스 아테네의 시인이자 정치가

크로이소스의 궁궐에 솔론이 온 지 사나흘쯤 지났을 때, 크로이소스는 시종을 시켜 솔론을 보물창고로 안내하게 했다. 세계 각처에서 모아들인 온갖 호화로운 보물들을 돌아보고 온 솔론에게 크로이소스는 이렇게 물었다. “지혜로운 자여, 그대는 이제까지 본 사람들 가운데 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오?” 크로이소스는 자기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이 박학다식(博學多識)한 철학자를 통해 객관적으로 확인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솔론의 대답은 전혀 엉뚱한 것이었다. “왕이시여, 아테네 사람 텔로스가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실망스러운 빛을 애써 감추며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러나 솔론의 설명은 저으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솔론에 따르면 텔로스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던 까닭은 다음의 세 가지였다. 첫째, 그가 아테네라는 번영하는 나라의 시민이었다는 것. 둘째, 그의 자식들이 모두 훌륭하였으며 텔로스보다 먼저 죽은 자식이 없었다는 것. 그리고 셋째로 그의 삶이 순탄했으며 무엇보다 그의 죽음이 매우 영광스러웠다는 것, 이 세 가지였다.

아테네에서 온 현인은 권력과 재산을 내가 아무리 많이 독점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행복을 보증해 주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한 개인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 조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재산과 권력이 아니라 개인이 속한 공동체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정치적인 공동체, 즉 나라이다. 그리고 텔로스라는 이름에서 시사하듯이 ‘인생에서 어떻게 죽는가?’ 이것이 헬라인들의 핵심 관심이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런 말은 왕의 마음에 어떤 감동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눈에 보이는 재산과 권력 그리고 이를 통해 그가 지금 누리는 쾌락의 양으로만 행복을 측정하는 전제군주에게 솔론의 말은 허황한 설교에 지나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는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한 키루스 대왕의 공격을 받아 패배의 굴욕을 당하고, 결국 페르시아의 속국으로 전락하는 신세가 된다. 당시 기원전 6세기는 키루스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창건하고 그 세력을 확장하던 때였다. 아르메니아 Armenia, 아시리아 Assyria, 메디아 Media 등의 강대국을 차례로 굴복시킨 키루스 대왕은 크로이소스 왕이 통치하는 리디아를 공략하기 위해 계속 행군을 했다. 키루스 대왕이 리디아의 수도를 함락시키고 크로이소스는 전쟁 포로로 잡혔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따르면 “크로이소스는 14년간 통치했고, 14일간 포위되어 있었다”라고 한다. 일국의 왕으로 누렸던 14년의 부귀영화가 단 14일간의 항전(抗戰)으로 허무하게 끝난 것이다.

탁월함을 추구하는 삶의 노력이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이어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기준이거늘, 얼마나 많은 거짓 리더들이 권력과 부의 축적이 행복의 기준이라고 가르치고 있는가? 또한, 그들의 왜곡된 행복 추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고 있는가? 지금 헤로도토스는 한 어리석은 군주의 행복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보여줌으로써 바로 이런 허황한 행복의 추구가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이었음을 드러내고자 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구약 성경과 아주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구약 성경 『에스더』에서 주연급 조연으로 등장하는 아하수에로 왕은 그 역사적 전환점에서 활동했던 크세르크세스(Xerxes) 왕, “죽으면 죽으리라”를 외쳤던 에스더의 남편이다. 아하수에로는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의 히브리식 이름이다. 아하수에로는 구약 성경 에스라 4장 6절에도 그 이름이 등장한다.

『에스라』에는 그가 즉위할 때에 유대 민족의 대적들이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유대 민족들을 훼방하는 글을 올렸다는 내용이 소개되고 있다. 페르시아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에는 크세르크세스 왕이 남긴 유적들이 많은데, 그 유적 중에는 그에게 복종했던 여러 나라의 이름이 기록된 비문도 있다. 그 비문에 새겨진 나라들은 에스더 1장 1절의 “아하수에로는 인도로 구스까지 일백이십칠 도를 치리하는 왕이라”는 서술과 일맥상통한다.

편집부 gcilbo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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